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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의 미학

어쩌면 나는 집시였나 보다.

by 전갈 2023. 6. 30.

일을 보러 멀리 코발트블루가 아름다운 해안 도시를 다녀왔다.

꽤 먼 곳이라 낯선 풍경이 주는 즐거움에 흠뻑 취했다.
출장을 가든, 일을 보러 가든
눈에 익지 않은 곳의 설렘은 내겐 늘 여행이다.
 
내 이럴 줄 알았다.
겨우 하룻밤 지났는데
가방을 풀어보니 아쉬움은 온데간데없고
쪽빛 바다를 떠나온 거리의 제곱만큼
벌써 그리움이 쌓인다.
 
먼 바닷가 도시 사람들의 선하고 아름다운 얼굴
작은 점들로 떠 있는 배들과 멀리 뻗은 해안선이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 하마나 눈에서 지워질까.
몇 날이 지나야 겨우 잊힐까 모를 일이다.
아마 며칠은 족히 몸살을 앓을 것이다.
 

늦은 귀항, 38cmX57cm, 수채화, 2020

 
예전에 그렸던 풍경으로 마음을 달랜다.
그림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그날은 물감이 잘 먹혔다.
 바닷가 노을을 제대로 표현했다며 내심 뿌듯했다.  
늦은 귀항을 서두르는 배는 물살에 흔들리고,
지는 해는 아득한 해변을 붉게 물들인다.
 
노을 고운 풍경을 뒤로하고
넘실거리는 파란 물결과 작별한 나는
밀려왔다 밀려가는 인파 속에 몸을 맡긴다.
 
뒷물결이 앞 물결을 밀치듯
뒷사람은 나를 지하철 안으로 구겨 넣는다.
가쁜 숨을 헐떡이며 목적지에 도착한 지하철은 
문밖으로 나를 토해낸다. 
 
오늘 아침, 도시는 짙은 안개에 젖었다.  
잔뜩 물기 머금은 도시의 아침은 더디다.  
다시 빌딩 숲속에 갇힌 나는 
사흘 내버려 뒀다고 잔뜩 토라진 일상을 다독인다.
그리 급할 것도 없는 줄 번연히 아는데도 
기다렸다는 듯이 앞다투어 달려온다.
 
잠시 안개를 음미할 시간을 주지 않고,
여유라곤 쥐뿔도 모르는 시간은 득달같이 앞으로 내달린다. 
뒤를 돌아보지 않는 시간을 따라잡으려면 
서둘러 집을 나서야 한다.  
 
마음으로야 뭔들 못할까.
생각은 이미 창공을 자유 비행하지만,
도시의 한가운데서 옴짝달싹할 수 없는 몸은 애꿎은 신발끈만 살핀다.
자칫하면 먼 곳으로 내뺄지도 모를 마음을 단단히 동여맨다.
 
어쩌면 전생에 나는 유목민이었나 보다.
떠나고 싶은 마음이 이리도 많으니까 말이다.
물을 실컷 마셔도 금방 목마른 아이처럼
돌아오자 떠나고 싶은 이 지독한 설렘을 어찌할까.
 
다음 생에는 바람으로 태어날까 보다.
아무리 산이 높아도
아무리 바다가 넓어도
자유롭게 부는 그런 바람이 되고 싶다.
 
단단한 동아줄에도 묶이지 않고
사방 막힌 벽에도 갇히지 않고
마음먹으면 언제든 훌훌 털고 떠날 수 있는
그런 바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