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존재와 부재의 미학

空은 이해가 아니라 깨달음이다.

by 전갈 2022. 3. 27.

2022년 1월 7일(금)

 

촌철살인, 스님의 한 말씀

스님께서 내가 쓴 글을 보고 아름답다고 칭찬해주신다. 실제 내 글이 그리 빼어나기야 할까만 스님께서 넉넉한 마음으로 높게 평가해주신다. 분명 과찬의 말씀인 줄이야 짐작 못할 바가 아니지만 그래도 기분이 싫지 않은 걸 보니 아직 수양이 부족함을 스스로 드러낸다. 그러나 스님께서 촌철살인의 날카로운 지적을 아끼시지 않으신다. ‘색즉시공에서 의 개념을 내가 너무 좁게 봤다고 말씀하신다.

 

사흘 째 점심 공양 때 스님의 그 말씀을 듣고 오후 내 생각했다. 무엇을 잘 못 이해한 걸까? 아 그렇다. ‘의 뜻을 잘 못 이해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릎을 탁 칠 정도로 느낌이 왔다.

 

처음부터 의 뜻을 공간의 개념으로만 생각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은 원자 내부의 공간이 비었다거나 원자 내부 면적의 99.99%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다. 물론 그런 뜻도 부분적으로 포함하지만, 은 그보다 훨씬 넓고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모든 것은 인과 연의 상호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존재의 본질은 이 우주에 무수히 많은 것들이 상호 상관적인 의존관계를 뜻한다. 이 상호의존 관계의 짜임새를 잡으려 하면, 잡을 수 없고 실상 하나의 빈 허공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안개구름도 손으로 잡으려 하면 잡히지 않는 무()에 불과한 것과 같다.

 

유즉시무 무즉시유’(有卽是無 無有是有無=존재가 곧 무요, 무가 곧 존재다)에서 설파한 것처럼, 삼라만상의 모둔 것들은 다 상관적으로 존재하게 하는 빈 터전으로 볼 때 무에 해당한다. 그러나 무는 모든 삼라만상을 다 존재하게 하는 힘으로 마치 안개구름 잡으러면 잡을 수 없는 것이기에 공하다. 결국 존재는 인과 연의 상호관계이고, 그것은 실체가 없는 공 혹은 무다. 마치 안개가 눈앞에 있지만 잡으려면 사라지기에 존재하면서도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이처럼 존재물, 사물, 실체, 현상 속에는 그것의 실체이나 본질이 처음부터 존재한 것은 아니다. 삼라만상은 스스로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인과 연의 상호작용에서만 생기하고 존재한다. 따라서 처음에는 실체와 아가 없는 상태인 이다. 따라서 은 사물에는 실체가 없고 사물의 본질이 없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모든 것은 假的 화합(조건에 맞다면, 인에 어떤 특수한 상호작용이 미치는 연이 있다면, 절대적 조건이 아니고 실체적 조건도 아니고, 그때 인과 연이 상호작용하는 상황에서만 일어나는 화합)에서 생긴다. 따라서 원래부터 사물이나 존재의 실체가라든가 물체의 본질 혹은 자아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제법무아(諸法無我)의 원리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는 인과 연의 상호작용에 따라 생기한 것이고 그러한 연기의 결과로 현재 존재한다. 모든 물상은 일시적으로 맞아떨어진 연기의 법칙으로 존재한다. 만일 인과 연의 상호작용이 사라지거나 연기법칙이 맞지 않으면 물상은 생겨나지도 않는다. 따라서 어떠한 항상 불변하는 자아나 실체(無子性)는 없고 오직 제행무상이며 제법무아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인과 연의 연기가 맞을 때 생기고 그 결과 존재하게 되고 현상은 생겨난다. 처음부터 실체가 있는 것은 없고,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에서 이다.

 

은 허무나 무의미를 뜻하는 말이 아니다. 모든 물상은 실체를 갖지 않고 인과 연에 따라 생기하는 것이므로 현상 자체는 일시적으로 생성된 허상이라는 뜻이다. 현상()이 허상이라면 집착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다. 허상이 사라지면 공이 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현상에 집착하는 것은 실체가 존재하지 않고 인과 연에 따라 생기한 허상에 집착하는 것이다. 따라서 색은 허상(色卽是空)임을 알고, 허상인 세상(공즉시색)을 집착하지 않고 살아야 한다.

 

머리로는 이렇게 이해하지만 여전히 깨달음은 쉽지 않다. 을 제대로 이해하고 의 본질을 보려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러야 할 것이다. 말과 글로 풀어 쓸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오직 깨달아야 진정한 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물질의 근본도 상호작용, 因緣生起.

물리학의 세계도 그렇다. 처음에는 분자 다음에는 원자 마지막에는 원자핵이 물질을 구성하는 가장 작은 단위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사물의 실체고 본질이라고 본 것이다. 그렇다면 물질은 이 아니라 스스로 독립해 존재하는 실체가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최근 입자물리학의 연구에 따르면, 물질의 작은 단위라고 생각하는 기본 입자는 표준모형의 쿼크와 렙톤, 게이지 보손과 힉스 보손이다. 원자핵의 양성자와 중성자를 구성하는 물질이 바로 이것들이라는 주장이다. 물론 이것이 다가 아닐 것이라는 주장이 벌써 나오고 있고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다. 따라서 현대물리학이 밝힌 사물의 실체나 본질은 여전히 100% 완결되지 않았기에 물질의 실체가 있다는 주장은 확인되지 않는다.

 

최근에는 물체의 가장 작은 단위인 소립자가 입자()이 아니라 길이를 가진 이라는 초끈 이론이 등장했다. 이들은 모든 소립자의 본질은 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현실에서 우리가 보는 노끈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길이만 있고 굵기만 있는 기묘한 끈이다. 길이가 10-37cm(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1cm)의 무지하게 짧은 길이다. 원자가 10-12cm이고 원자핵이 10-17cm인 것과 비교하면 얼마나 작은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초끈 이론은 물질의 최소 단위인 모든 소립자들 사이에는 상호 작용하는 힘(핵력, 약력, 강력, 중력)이 존재한다. 그 힘의 상호작용에 의해 소립자가 생성된다. 끈의 진동과 회전 상태의 차이가 입자의 성질(질량, 전하, 스핀 등)의 차이를 발생시킨다. 결국 끈의 파동이 소립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힘의 상호작용의 영향을 받아 물질의 특성을 만든다는 것이다. 결국 어떤 파동이 인이 되어 그것과 서로 힘을 주고받는 연에 의해 물질의 성질이 생기한다는 것으로 해석하면 될 것이다. 파동이란 인과 힘의 상호작용이라는 연이 물질을 생기시킨다는 의미이다.

 

사진 출처 : https://steemit.com/kr/@sleeprince/22ponh

그렇다면 의 참 뜻은 ?

공은 없다혹은 비었다라는 뜻으로 해석하기엔 너무 심오하다. 정말 아무것도 없다면 아무것도 생길 수 없다. 무에서는 어떤 것도 생길 수 없음은 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인이 없는데 연이 있을 수 없고, 연이 없는데 어찌 生起가 가능할까? 그렇다면 은 다른 깊은 뜻이 있을 것이다.

 

물질을 쪼개어 최소 단위로 가면 그곳은 빈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비어 있지 않고 그곳에 뭔가 있다. 무언가가 없다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뭘까? 에너지?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에너지 혹은 라 불리는 보고 느끼고 만지고 냄새 맡고, 어떤 것도 가능하지 않는 무언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아닌 물질의 파편이나 극미한 조각은 아니다. 만일 그것이 우리가 아는 물질, 즉 색의 극미한 파편이라면 굳이 그것을 공이라 말할 게 뭐 있나? 그저 색은 극미한 조각들로 이루어진다고 말하면 그뿐이지.

 

그러면 공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물질의 최소단위가 아닌 형태로 존재한다. 그것은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또 아무것도 안 될 수 있다. 조건이 맞으면 어떤 색으로 들어날 것이고 조건이 맞이 않으면 그 상태로 무를 것이다. 우리 눈에는 아무것도 아닌 없거나 빈 곳으로 보일 수 있다. 결국 이 되는 그 무엇인가는 잠재나 혹은 법성이라 말할 수밖에 없다. 말이나 글로서 표현할 수 없다. 풀어서 사람들에게 이해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깨달음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관찰할 때만 전자의 위치를 알 수 있듯이 깨달음으로만 공의 의미를 알 수 있다.

어쩌면 깨달음이란 관찰 상태가 될 때 공은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마치 원자 속의 전자가 어디에도 있거나 어디에도 없는 형태로 있다가 관찰하는 순간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과 비슷하다. 도구를 이용해서 전자의 움직임을 관찰할 때 비로소 움직임을 멈추고 입자 상태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전자의 특성이다. 그래서 전자의 위치와 특성은 관찰하기 전까지는 무어라 확정할 수 없는 불확정성을 갖는다. 그렇다고 해서 전자의 이러한 성질을 우리는 공이라 할 수 없다. 그렇게 보기에는 공의 개념을 너무 좁게 보는 것이다.

 

전자의 위치는 안개 모양을 띠고 있다. 분명 안개 속에 전자라는 실체는 존재하지만 막상 잡으려면 잡히지 않는다. 전자의 위치를 확인하는 유일한 길은 관찰하는 수밖에 없다. 최첨단 과학 장비를 동원해서 전자의 위치를 관찰하는 순간 안개는 사라지고 입자를 띤 전자의 모습이 드러난다. 안개 속에 있던 전자의 위치와 존재가 확인되는 것이다. 이것은 공을 확인하기 위해서 깨달음이 필요한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닐까? 깨달음이 없다면 공의 진정한 뜻과 의미를 관념적으로는 알고 있지만, 그 정확한 모습과 의미를 확정할 수 없을 것이다.

 

전자의 위치가 정해진다 해서 그것이 물질 존재의 근원을 설명하는 건 아니다. 물질의 본질을 알기 위해서는 더 작은 단위로 내려가야 한다. 그럼 전자는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 양성자와 중성자는 무엇인가? 전자는 파동이면서 입자, 즉 빛 알갱이다. 그럼 빛 알갱이인 광자는 또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 광자는 전자의 정지질량에너지다. 그렇다면 모든 것의 근본은 에너지인가? 광자는 보존 입자로 돼 있다. 그러면 보존 입자는 또 무언가? 결국 근원을 찾다보면 궁극에서는 한계에 직면한다. 상태의 본질은 말과 글로써 알 수 없다. 오직 깨달은 자, 그것을 깨치는 순간이 곧 열반이다.

 

그렇다면 공은 과학적으로 규명할 수 없는 건가? 사유와 명상을 통한 깨달음으로만 알아야 하는가? 설혹 그것을 깨달았다 해도 그 내용을 말과 글로 전달할 수 없다는 걸까? 결국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지금까지 우리가 정의한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가가 연기를 통해 색을 만든다는 걸까? 그래서 그 무언가는 오직 열반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걸까? 그걸 알게 되면 집착과 번뇌에서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과학적 탐구인 존재론이 아니라 사유의 대상인 인식론의 문제가 아닌가?

 

현대물리학이 찾아낸 물질의 최소 단위는 원자이고 원자 내부의 전자와 핵을 이루는 광자와 소립자의 존재이다. 소립자를 이루는 건 끈(string)이라는 것이 현재물리학의 현재까지 밝힌 업적이다. 그렇다면 끈의 본질을 아직 정확하게 규명하지 못한 상태라면 과학은 공의 실체를 밝히지 못한 것이다. 깨달음만이 유일하게 공을 알 수 있다는 붓다의 지혜가 그래서 유효한가 보다.

 

공의 실체가 무엇이든 그건 자성이 없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것을 이어주는 뭔가와의 상호작용이 필요한다. 현대물리학이 말하는 양자장의 역할을 하는 것이 연이다. 인은 공의 실체인 무언가라면 그것을 색으로 발현하게 해주는 것이 연이다. 그래서 공에서 색이 발생하는 것이 인연생기. 즉 연기설이다. 인이 있고 그 인과 연이 상호작용함으로써 색이 생기한다. 현대물리학의 끈(string)은 인이고 그것을 발현시키는 물리적 특성은 연이 된다. 그 둘이 만나 인연을 만들어 소립자가 생기한다. 즉 인연생기다.

 

색은 물질만 말하는 건 아니다. 공의 연기가 만드는 현상이 색이다. 옆 사람이 소리를 질러 화가 난다. 이때 옆 사람이 소리를 지른다는 건 인이고 그것이 내 신경을 건드린 것이 연이다. 공이 진짜 아무것도 없고 빈 마음이라면 어떤 인이 있더라도 연에 반응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감정이라는 색, 즉 현상이 생기하지 않는다. 결국 공이란 것은 무나 빈 것이 아니라 우리 의식의 본질적인 상태를 뜻한다. 만일 옆 사람이 소리를 쳐도 그럴 사정이 있겠거니 하고 생각하면 화는 사라진다. 색은 공으로 화한 것이다.

 

그 연의 결과로 화가 나는 색이 일었다. 어떤 이를 보고 연정을 품어 괴롭다. 어떤 이는 인이고 연정을 품는 건 연이다. 인을 만나 대화한 조건으로 연이 생겼다. 그 결과 괴로움이란 현상이 생기한 것이다. 만일 우리 마음의 근원에 아무것도 없고 텅 비었다면 어떤 인에도 연정을 품을 까닭이 없다. 인이 발생해도 연과 상호작용할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연정을 품는다 하면 내 마음의 본성에 그런 인과 연을 그리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공으로 인해 인과 연이 작용하고 연정이라는 감정이 발현한 것이다.

 

이처럼 공은 단순히 물질의 생기만 말하는 것이 아니리 우리의 희노애락도 색이요 현장이기에 공의 상태에서 어떤 조건이 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공이 색을 나쁘게 발현하지 않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다. 우리 마음의 상태인 공에서 나쁜 색이 발현되고 집착이라는 미몽이 생긴다면 그것을 버리는 공을 만들어야 한다. 애욕의 괴로움이 그것에 집착하는 마음의 상태인 공으로 인해 생긴다면, 그 공을 비우고 깨끗이 하면 된다. 집착의 덧없음을 깨닫고 행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공이 좋은 색을 만드는 것이다. 즉 공즉시색이다.

'존재와 부재의 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실은 있는가?  (0) 2022.04.01
스님과의 공부  (0) 2022.03.28
생각과 행동의 불일치  (0) 2022.03.27
분자, 원자 그리고 빨간 벽돌집  (0) 2022.03.24
원래부터 존재한다.  (0) 2022.0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