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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고도 가까운 경제학

부자 황제 만사 무사(Mansa Musa)

by 전갈 2022. 3. 29.

2022년 3월 29일(화)

 

황제의 나들이

황금을 든 만사 무사 황제 - 사진 출처 : https://mbiz.heraldcorp.com/view.php?ud=20121018000265

사람들은 부자가 되길 원한다. 물욕이 없는 사람들은 굳이 부자가 되길 원하지 않겠지만 보통 사람들로서야 가난한 삶보다는 부유한 삶을 더 좋아한다.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고 노력하는 까닭도 남보다 더 윤택하게 살기 위해서이다. 잠을 설쳐가면서 공부하는 학생들, 해가 뜨기 전인 이른 아침에 부지런히 일터로 가는 사람들, 어디에서 있든 다들 최선을 다해 생활하면 더 나은 내일이 오리라는 희망으로 살아간다. 물론 돈이 많다는 것이 꼭 행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 해도 사람들은 부자가 되길 바란다. 그렇지만 재산은 신기루와 같아서 어떻게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 신기루처럼 사라지기도 한다. 

 

서둘러 집을 나섰으니 길가엔 벌써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온나라 사람들이 다 나왔다. 인근 마을 사람들은 물론이고 숲속 깊숙한 곳의 먼 부족 사람들도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독실한 이슬람 신자인 만사 무사(Mansa Musa) 황제가 멀리 아라비아에 있는 성스러운 땅으로 순례를 떠나는 날이다. 길가에 자리 잡은 이들은 황제 일행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행운을 얻었기에 제법 자랑스러운 얼굴을 한다. 뒤에서 까치발로 앞사람의 어깨 넘어 뚫어져라 쳐다보는 이가 있는가 하면 아예 나뭇가지 위에 한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도 있다. 생전에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모인 것을 본 적이 없다. 나라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모였을까 싶을 정도로 사람들로 산과 강을 이루었다.

 

한참을 기다리다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와 이윽고 들리는 환호 소리에 황제 일행이 가까이 왔음을 알았다. 앞사람의 어깨 사이를 비집고 고개를 들이민다. 황제의 행렬을 이끄는 젬베(Djembe)의 음악 소리가 요란하고 알록달록한 깃발로 휘장을 두른 군사들의 모습이 위풍당당하다. 말리의 전통 타악기인 젬베의 카랑카랑하고 높은 음색이 아프리카의 영혼을 깨운다. 심장을 울리는 음악 소리에 맞추어 사람들이 신나게 춤을 추며 황제 일행을 따른다.

 

창과 방패로 무장한 말리의 전사들 사이로 갓 떠오른 태양 아래 한껏 위용을 자랑하는 각진 황제의 검은 얼굴이 보인다. 사람들의 환호 소리, 손뼉 치는 소리가 온 나라를 뒤흔들 기세이다. 화려하게 치장을 한 800명이나 되는 황제의 아내가 함께하고 12,000명의 노예가 뒤를 따른다. 48,000명의 상인이 각종 진귀한 물품을 낙타에 싣고 한몫 챙길 요량으로 성지순례를 떠난다. 100마리가 넘는 낙타 등에는 황금 11톤과 식량을 가득 실었다. 황제의 행렬이 10리 가까이 긴 꼬리를 물고 이동하였다. 만사 무사 황제가 카이로를 거쳐 메카로 성지순례를 떠나는 13247월 어느 아침의 풍경이다.

 

오색 깃발이 나부끼고 화려하기가 아프리카의 태양을 무색하게 만든 황제의 행렬은 마치 도시 전체가 이동하는 장대한 풍경이었다. 한껏 멋을 부린 황제의 아내들이 재잘거리는 소리가 메마른 사막의 바람을 타고 이집트의 도시로 퍼져갔다. 카이로로 가는 길가에는 황제의 행렬을 보기 위해 끝없는 줄일 이었다. 기분이 좋아진 황제는 메카를 향해 기도를 올린 다음이면 어김없이 길가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황금을 아낌없이 뿌렸다. 이때 뿌린 황금의 양이 얼마나 많았으면 이집트에는 금값이 10년이나 넘게 폭락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만사 무사는 세계 최고의 부자답게 통 큰 씀씀이를 자랑하였다. 만사 무사의 화려한 메카 순례 여행은 말리 제국의 얼마나 부자인지를 지나는 나라마다 제대로 알려주었다. 황제에 관한 소문은 사람들이 입을 통해 더욱 부풀려지면서 이슬람 국가뿐만 아니라 멀리 중세 유럽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만사 무사 황제의 배포를 세상에 널리 알렸지만 정작 순례를 마치고 말리로 돌아오는 길에는 돈이 떨어졌다. 할 수 없이 인근 국가에서 빛을 내어 귀국 길에 오르는 통에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당시 세계 황금의 2/3, 소금의 50%를 생산하는 엄청난 부자 나라였다. 만사 무사는 말리의 황금기를 이끌었는데, 지금의 기니, 말리, 세네갈, 감비아, 코트디부아르, 브루키나파소, 가나 등 광대한 지역을 통치하였다. 2012년 미국의 ‘셀러브리티 넷 워스’(Celebrity Net Worth) 역대 세계 최고의 부자를 25인을 발표했다. 이 발표에 따르면, 말리의 만사 무사 1세가 약 4,000( 440) 달러의 재산을 소유한 역대 최고의 부자이다. (자료 출처 : https://mbiz.heraldcorp.com/view.php?ud=20121018000265

 

말리의 몰락

 

말리공화국

마을 공터에는 날마다 북쪽 알제리에서 사하라를 건너온 대상들로 시끌벅적하다. 황금을 사고파는 사람들, 소금을 사서 남쪽으로 팔러 가는 사람들, 튼튼하고 일 잘하는 노예를 팔러 가는 사람들, 동쪽 나라에서 구해 온 진기한 향신료를 파는 상인들은 말리를 거쳐 사하라의 남쪽으로 향한다. 나이저 강을 건너서 기니나 세네갈의 상아해안으로 가서 장사하려는 상인들의 길목이라 북새통을 이루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1800년대 말, 식민지를 개척하려는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유럽국가들이 호시탐탐 아프리카를 차지하려 틈을 노렸다. 프랑스는 말리를 비롯한 알제리, 모리타니, 기니, 세네갈 등 아프리카 서북부의 대부분 나라를 식민지로 점령했다. 1883년에 프랑스의 식민지가 말리는 1960년에 독립하기까지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도 한참이나 시간이 결렸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프랑스의 지배를 받은 말리가 프랑스 말을 사용하고 프랑스풍의 문화가 남아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19606월 독립을 획득한 말리는 세네갈과 연합정부를 구성하여 밀월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연합정부에서 세네갈이 탈퇴하면서 지금의 말리공화국이 되었고, 북쪽은 알제리, 동쪽은 니제르, 남쪽은 기니, 서쪽은 세네갈 등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의 사정이 그렇듯 독립 이후 말리는 심각한 국가 내전 상태로 돌입하였다. 아프리카에는 오랜 옛날부터 말도 다르고 종교도 다르고 풍속도 다른 많은 부족이 살았다. 옛날부터 말리에도 수많은 서로 다른 부족들이 각자 부족국가의 형태로 독립된 생활을 하였다.

 

인구 150만 명의 유목민인 투아레그족은 말리인과는 뿌리가 다른 민족이었다. 사하라 사막에서 나이지리아, 말리, 수단 등 서아프리카 살았던, 이들은 고유의 문자와 문화를 가지고 있기에 애초부터 말리에 동화할 이유가 없었다. 프랑스가 식민지를 건설하면서 편리하게 통치하기 위해 이들을 말리에 편입하였으니 이때부터 내전의 비극적 씨앗이 뿌려졌다. 말리가 프랑스로부터 독립하자 투아레그족도 당연히 말리에서 독립을 원하는 요구가 폭증했다.

 

20131월 평화협정이 체결되어 내전이 중단되기 전까지 말리의 여러 도시에서 총성이 울렸다. 거창한 대의와 명분을 가지고 전쟁을 일으키지만 사은 자신들의 정치적 혹은 종교적 이해관계를 강요하기 위한 것이 대부분이다. 거창한 구호와 슬로건 아래 같은 민족 간에 흘리는 피의 대가는 선량한 국민의 몫이라는 것이 가혹한 역사의 교훈이다.

 

내전의 발단이 된 투아레그족의 독립 요구나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강력한 율법의 국가 건설도 따지고 보면 지극히 정치적이자 종교적인 이해관계의 산물이다. 특히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이슬람 율법이 지배하는 나라를 만들자는 요구는 알카에다의 주장과 유사하였기에 미국과 프랑스를 강하게 자극하였다. 말리와 북부 아프리카에서 이슬람의 세력 팽창을 원치 않은 미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연합군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 수많은 사상자와 48만 명 이상의 무고한 이재민을 만들고 내전은 끝이 났다. 그러나 지금도 이슬람 반군의 잔존 세력과 투아레그족이 남아 있어 말리 화국에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다.

 

말리공화국의 영광과 좌절

천년만년 갈 것 같은 만사 무사 황제의 황금도 말년에 손안의 모래처럼 사라졌다. 황제가 죽고 나자 자식들 사이에 왕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형제 사이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으로 말리제국의 영광도 서서히 저물었다. 당시 재산이 4,000억 달러라 되었던 만사 무사는 메카로 성지순례를 떠나는 길에 엄청나게 많은 인원을 동원하였다. 가는 길마다 황금을 뿌렸으니 소금과 황금이 아무리 많다 해도 무한정 퍼내기만 하면 고갈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영원불멸할 것 같은 말리제국은 만사 무사의 낭비로 인해 국고가 거들나고, 제국의 영광도 서서히 저물었다.

 

말리공화국은 인구 약 1,300만 명이고 국내총생산이 200억 달러 정도에 불과하다. 1인당 국민소득은 476달러로서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들 가운데 하나이다. 더욱이 격렬한 내전과 이슬람 반군의 위협으로 국가의 재건을 엄두도 내지 못하는 아프리카의 비극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한때 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황제가 통치하던 황금 제국의 위상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오늘의 말리는 과거의 영광을 뒤로 한 채, 내전과 가난, 피란민으로 넘쳐나는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의 참상을 그대로 겪고 있다.

 

만사 무사 황제가 말리공화국을 통치하던 시절 유럽에서는 이미 과학과 예술의 눈부신 발전이 시작되었다. 인간 중심의 문학과 사상, 예술의 부흥, 즉 르네상스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이는 이 시기에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한 베네치아 상인들의 활발한 부의 축적을 바탕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유럽에서는 상업자본이 본격적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유럽 사회는 이미 중세의 질서가 무너지고 상업자본가들이 지배 세력으로 등장하는 근세의 뿌리가 쑥쑥 자라고 있었다.

 

말리공화국의 비극은 만사 무사 시절의 황금기를 상업자본으로 전환하지 못했다. 만사 무사 황제가 상업에 관심이 있었다 해도 당시 지중해에는 해적들이 득실거리고 육로에는 도적 떼가 출몰하던 시절이라 상인들이 길을 나서기 힘든 시절이었다. 만사 무사 황제가 죽고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상인들이 안전하게 장사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상인들이 장사를 통해 돈을 벌고 그것이 기반이 되어 대량 생산이 가능한 기계를 발명할 밑천이 된 것이다. 수공업에서 기계공업으로 전환하는 산업자본의 시대가 열리는 계기가 된 것이 상업자본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국가가 곧 황제의 재산으로 간주되던 절대왕정 시절이었기 때문에 개인의 상업 활동이 적극이지 못한 것도 이유일 것이다. 황금과 소금이 황제의 소유로 되어 있는 상황에서는 일반 국민의 경제적 이윤 동기가 그리 높지 않았다. 황제와 그의 측근들만이 경제적 이득을 누리는 상업 활동의 특권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만사 무사 황제의 말리공화국이 제국의 영광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국가자본이 상업자본으로 순조롭게 전환해야 했었다.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황제의 권력이 상업을 독점함으로써 역사의 도도한 흐름에 역행했고, 말리공화국의 영광도 종말을 고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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