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해서 좋지만...
곰브리치는 아 책을 저술할 때 다음의 세 가지 원칙을 세웠다. 그가 이러한 원칙을 고수하며 책을 저술했기에 지금도 널리 읽히는 미술 입문의 훌륭한 길라잡이가 되었다.
첫째, 도판(그림)으로 보일 수 없는 작품은 가능한 언급을 피한다. 그래야 수많은 인명을 나열하는 불편함을 피할 수 있다. 그렇지만 도판을 제시한다는 원칙은 작가와 작품의 수가 제한된다는 것을 인정한다.
둘째, 진정으로 훌륭한 작품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단순히 인가나 유행을 얻을 수 있는 작품을 배제한다. 그는 재밌고 기괴한 작품들을 포함시켰다켠 이야기가 훨씬 박진감이 넘칠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만 그것을 거부했다. 재미를 위한 작품을 선정하느라 진정 훌륭한 걸작이 제외된다면 독자들이 의당 의문을 제기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셋째, 그는 자신의 기호로 인해 널리 알려진 유명한 걸작들이 제외되지 않도록 임의대로 도판을 정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진부한' 작품들의 낯익은 모습이 오히려 새로운 분야에 들어와서 방향을 잡으려는 사람들에게 고마운 이정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설혹 자신이 덜 알려진 걸작들을 좋아하는 한이 있어도 이미 유명하고 알려진 작품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독자들이 그러한 그림을 다시금 새로운 눈으로 볼 수 있게 하는 데 도움을 주길 희망하기 때문이다.
오호 그렇다면 미술 초보자인 내게 딱 맞겠다. 저자는 자칫하면 어려워지기 쉬운 미학과 미술의 역사를 대학 초보자들이 이해하기 쉬운 말로 표현했다. 이를 위해 전문용어를 가능한 한 적게 쓰려고 했다. 사실 미술을 제대로 알려면 그 시대의 역사와 사람들의 생각 그리고 철학을 알아야 한다. 이런 것들을 전문용어를 가능하게 적게 쓰고 독자에게 전하려는 저자의 의도가 얼마나 훌륭한지 짐작이 간다. 특히 저자는 논의된 작품들을 역사적인 배경 속에서 파악하고 그것을 통해 이해하는 방향으로 서술하였다.
아쉬운 점도 있다. 문장이 너무 길고 조밀하다. 미술 전반을 제대로 모르는 초보자들은 책의 두께와 문단의 길이에 일단 기가 죽는다. 조각과 건축에 비해 회화가 지나차게 비중을 많이 차지한다는 점을 저자도 인정한다. 그 까닭으로 조각과 건물에 비해 회화 도판이 보다 원작에 가까운 모습을 전해줄 수 있다는 점을 든다. 또 이미 건축 양식에 관한 훌륭한 역사서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조각과 건물 도판의 비중을 상대적으로 줄였다는 것이다.
저자는 원시시대 미술부터 20세기에 이르는 미술의 긴 과정을 소개한다. 방대한 자료와 작품을 소개하면서도 자기과시의 현학적 표현을 극도로 자제했다. 자신이 말한 대로 불필요한 전문용어를 가능한 한 최대한 배제하였고, 구체적인 예를 들면서 미술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그는 암기해야 하고, 대부분의 독자가 싫어하고 등을 돌리게 만드는 교과서처럼 기술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실천했다. 책을 읽는 내내 비교적 편안함을 느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책의 원제목은 『미술 이야기』(The Story of Art)다. 즉 미술의 역사라는 딱딱한 말보다 이야기라는 부드러운 이름을 붙였다. 총 28개의 장으로 선사시대와 원시미술에서 출발해 21세기 전반기의 실험미술과 모더니즘까지 방대한 미술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방대한 미술 이야기를 쪽마다 사진을 넣고 꼼꼼하게 설명한다. 가끔은 눈이 아플 정도로 상세하게 기술하여 책의 두께도 거의 700쪽에 가깝다. 물론 서양 미술의 역사를 한 권의 책으로 담기에는 많은 생략과 압축이 있었다. 이점을 저자도 인정하지만 나 같은 초보자는 이것도 만만찮은 분량임에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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