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태양을 향한 지구의 공전과 자전이다.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1초에 29.8km 나아가면서 한 바퀴 돈다. 동시에 지구는 23.5도 기울어진 회전축을 1초에 463m 속도로 회전한다. 지구가 회전축을 중심으로 한 바퀴 회전(자전)하는 동안 낮과 밤이 한 번씩 바뀐다. 그리고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크게 한 바퀴 회전(공전)하는 동안 계절이 바뀌고 낮과 밤이 365번 바뀐다.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한 큰 회전 운동과 회전축을 중심으로 한 작은 회전 운동을 기준으로 시간이라는 단위를 고안했다. 밤과 낮이 한 번 바뀌는 것을 24시간이라 정하고, 1시간을 60분, 1분을 60초로 나눴다. 24시간이 365번 반복되는 것을 1년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우리가 말하는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시간의 실체를 갖거나 물리적 존재가 아닌데 어떻게 흐른다는 말인가? 실제 흘러가는 시간이란 없다. 지구가 태양을 향해 공정하고 자전하는 동안 일어나는 변화를 우리는 시간으로 개념화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근대 물리학의 창시자인 뉴턴은 “수학적이며 진리적인 절대 시간은 외부의 그 어떤 것과도 상관없이 그것 자체로서 일정하게 흐른다”라고 말했다. 절대적 시간이 존재하고 그것은 우리와 상관없이 일정한 속도로 흐른다는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라이프니츠는 “시간은 다른 것과의 관계, 특히 관찰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관찰자가 사용하는 시계로 재는 시간만이 의미가 있다.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시간이란 없고 인간이 바라볼 때 시간이 의미가 있다.
불교에서는 시간을 공(空)의 개념에서 해석한다. 공(空)은 세상이 공간적인 기준에서 비었다는 개념으로 좁게 보지 않는다. 인(因)이 있어야 해서 연(緣)이 생기고, 그 결과 세상의 모든 물상이 생성한다는 것이 공(空)이다. 따라서 공이란 공간이 비었다기보다 인과 연이 없으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받아들이자.
물론, 공(空)을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얼마나 무지한가를 잘 안다. 공(空)을 해석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깨달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지식이 얕고 지혜가 없는 나 같은 사람은 수박 겉핥기로 개념을 정리할 수밖에 없는 지혜의 얕음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시간은 흐르지 않고, 우리는 변한다.
지구가 태양을 몇 바퀴 도는 동안 우리는 변한다. 태어나서 자라고 성인이 될 때쯤이면 지구는 태양을 30~40번쯤 회전했을 것이다. 그만큼의 시간이 흘렀고 나이를 먹는다고 말한다. 어쩌면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흐른다는 것은 지구의 공전과 자전이 반복되는 동안 우리가 변해가는 모습을 표현한 말일 것이다.
불혹의 나이는 말하자면, 지구가 태양을 40번 도는 동안에 나는 어린아이에서 성인이 되어 가족을 이룬 변화를 뜻한다. 그 사이에 직장에서는 상사가 됐고, 날씬한 허리가 굵어져 배도 나온 아저씨 체형이 됐다. 개인마다 차이는 있지만 대개 그 나이쯤 되면 그렇게 모습이 변해간다.
시간의 기준을 정하지 않으면 사람의 외모만 보고 나이를 가늠해야 할 것이다. 배가 더 나왔는지 아닌지 혹은 아이가 많은지 아닌지를 기준으로 먼저 태어나고 늦게 태어났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정에 따라 결혼을 늦게 한다든지 아니면 우연히 배가 덜 나왔는데 늦게 태어났다고 말하는 잘못을 범할 수 있다.
어쨌든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간다는 것은 태양을 향한 지구의 공전과 자전이 일어나는 동안 우리의 모습과 생각이 변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태어나서 죽는 순간에 이르기까지 지구가 태양을 회전하는 횟수는 70~80번이다. 물론 장수하는 사람은 100번이나 그 이상까지 살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인간은 죽음으로 향하는 존재”라는 하이데거의 말이 잘 들어맞는다. 따지고 보면, 나이가 든다는 것도 태양을 향한 지구의 자전과 공전의 기록이다.
사실 이렇게 시간을 말하면 너무 건조하다. 세월이 주는 쓸쓸함과 고독이라는 인간적 감정이 빠졌다. 시간을 개념적으로만 접근하면 쓸쓸함과 고독은 사라지고 무미건조한 일상만 남는다. 지구가 태양을 향해 나아가는 동안 변해간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안다. 그러나 사는 일은 그리 만만치 않다. 사는 일에 그렇게 열심이다가도 문득 혼자라는 사실에 화들짝 놀란다. 위안해 줄 아무것도 없다고 느낄 때 깊은 상념에 빠진다.
세월, 쓸쓸함이 주는 인간적인 이야기
시간이 흐르면 그리움도 무뎌지고 애틋한 기억마저 흐릿해진다. 푸른 바람이 젖은 머리칼 어루만지듯 세월은 기쁨과 슬픔을 매만져 준다. 기억은 추억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여전히 아련한 마음이다. 아득한 기억이 가끔 되살아나면 행복한 웃음을 짓지만 때로는 아픈 가슴이 먹먹해진다. 시간이, 세월이 흐른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사랑의 열병으로 잠 못 이룬 많은 밤이 그저 미소로만 남았다. 바윗돌에 새긴 약속이면 비바람에 씻기지 않는다. 햇빛과 달빛을 머금은 전설이 된다. 그러나 마음에 새긴 언약은 쉽게 빛이 바래고 흔적마저 희미해진다. 그저 한여름 밤의 꿈이었고 세월은 그렇게 흘렀다. 오늘도 지구는 태양을 향해 묵묵히 제 길을 가지만, 나는 여전히 지난 세월로 가슴앓이를 한다.
집으로 가는 길모퉁이에서 옛사랑을 만나면 어떤 모습일까? 흐른 시간만큼 무딘 마음으로 데면데면 그렇게 지나칠까? 그때는 터지려는 울음을 꾹꾹 삼키며 겨우 마음을 다잡은 걸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차라리 만나지 않았으면 고운 모습으로 남았으리라 후회할 것이다. 세월은 무심히 흘렀고 그렇게 우리는 변한다.
옛 가구는 시간의 손때가 켜켜이 쌓여 윤이 나는 아름다움을 뽐낸다. 출판사를 경영하는 조남호 회장은 수필집 『나무 심는 마음』에서 "세상에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아름다워지는 것은 나무밖에 없다“고 했다. 지구가 태양을 몇 바퀴 돌더라도 아름다워지는 나무처럼, 반질반질한 윤이 품위를 더하는 가구처럼 살면 참 좋겠다.
한여름답지 않게 제법 서늘한 이른 아침의 바람 탓일까? 문득 박인환 시인의 ‘세월이 가면’이 떠올랐다. 내친김에 ‘목마와 숙녀’를 읊조렸다. 세월이 가니 그도 가고, ‘목마와 숙녀’도 떠나버렸다. 시인의 말처럼, 목마는 하늘에 있고 철렁거리는 방울 소리만 내 귓전에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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