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월 들어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었다. 학교 앞에서 82번 버스를 타고 석암초등학교 초입에서 내린다. 걸어오는 동안 등에선 연신 땀이 흐른다. 화실 문을 열면 언제나 그림 도구들이 나를 반긴다. 물감과 이젤, 그림 그리고 시원한 에어컨 바람은 여름의 광폭한 열기를 식혀 주기에 충분하다.
세 번째 완성한 아크릴화다. 제법 그림 티가 난다. 바탕을 크게 네 등분해서 최종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색에 가깝게 두텁게 물감을 칠했다. 파란 하늘, 황혼에 물든 구름, 등대가 있는 언덕 위 집과 그 아래쪽, 노을 진 구름 아래의 바다, 이렇게 구역을 네 개로 나눠 각자에 적합한 색을 칠했다. 통째로 한 가지 색을 칠하는 것보다 완성했을 때를 상상하면서 미리 캔버스 바탕을 두껍게 칠해두는 것이 좋다. 그래야 최종적으로 완성된 색을 올리면 색채의 질감이 진중해서 그림의 무게감이 좋아진다.
이 그림에서 나이프를 사용하는 법을 배웠다. 붓으로 흰 구름을 그리면 덩어리로 표현하기 좋다. 그렇지만 미세하게 쪼개지는 구름을 표현하기에는 붓으로 미흡한 점이 있다. 이때 미리 하얀 물감을 캔버스에 듬뿍 묻혀 나이프로 문질러주면 균질하지 않게 구름이 퍼져나가는 효과를 볼 수 있다. 나이프가 수평이라 해도 면을 완전히 고르게 물감을 펴는 게 아니라 미세한 틈새를 보이기 때문에 미세하게 갈라진 구름 모습을 볼 수 있다. 나이프를 잘 사용하면 아크릴로 그림을 그릴 때 여러 가지 풍경을 묘사할 때 좋은 효과를 볼 수 있겠다. 특히 새털구름, 양떼구름, 뭉게구름, 안개구름 등 다양한 구름의 특징을 묘사하기에는 나이프만한 것이 없는 것 같다.
이 그림에서 하늘은 울트라마린블루, 코발트블루 등 고도 차이에 따라 조금씩 다른 파란색을 칠했다. 각기 다른 파란 색에다 흰색을 간간이 섞어 구름이 비치는 하늘을 표현했다. 덧칠을 많이 할수록 파란 하늘의 질감이 짙어지고 파란색의 느낌이 몽환적으로 변한다. 그림에서 색을 표현할 때는 하나의 색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blue에서도 여러 가지 색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 때때로 섞어서 사용하기도 하고, 때로는 각각의 색을 따로 사용할 수도 있다. 또 흰색 물감을 섞어 사용함으로써 단일 색이 갖는 튀는 점을 완화할 수 있다.
황혼의 구름을 칠할 때 노란, 갈색, 고동색, 주황색 등 다양한 색을 혼합해서 노을 진 구름 이미지를 연출했다. 저녁노을도 한 가지 색이 아니라 노랑과 빨강 사이의 무척이나 다양한 색의 변화를 보인다. 따라서 그림에서도 하나의 색으로 표현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색을 섞어 사용해야 제대로 된 노을 진 구름의 느낌을 줄 수 있다. 서양화에서는 색을 다채롭게 사용하는 능력이 그림을 돋보이게 만든다. 순수 혈통이 좋은 경우도 많지만, 그림에서는 색깔을 잘 섞는 혼합 혈통이 특히 대우를 받는다. 앞으로 색을 더 잘 혼합하고, 새로운 색을 만들어 내는 역량을 키워야 한다.
언덕을 표현하는 데 처음에는 어려움을 느꼈다. 어떻게 입체감을 줄 것인지 색 사용이 익숙하지 않아 당황했다. 언덕 밑 초록을 표현하는 건 그리 어렵지는 않았지만, 끝점에서 드러나는 바위와 그림 왼쪽 아래의 바위와 풀숲을 어떻게 묘사하는지가 은근히 걱정됐다. 다행히 선생님의 지도와 시연을 통해 숲속 이미지를 표현하는 법을 배웠다. 특히 바위의 절개 면을 표현할 때 나이프를 사용하면 매우 좋은 효과가 나오는 것을 배웠다. 짙은 자주색 물감을 나이프로 문질러 바위의 절단면을 실감 나게 표현할 수 있었다.
바닷가 풍경은 수채화 그릴 때 몇 차례 경험해서 그런지 비교적 무난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 수채화에서는 하얀 파도와 부서지는 포말을 표현할 때 그 부분에 물감을 칠하지 않고 흰 종이를 그대로 남겼다. 수채화에서는 흰색 물감을 칠하면 그림의 투명함과 깨끗함이 줄어들 위험이 있다. 이런 연유로 가능하면 흰 종이를 그대로 둠으로써 배경과의 색 차이를 통해 파도를 표현하는 방법을 택했다. 반면에, 아크릴 그림에서는 흰색 물감과 다른 밝은 물감을 섞어 하얀 파도를 표현한다. 흰색을 그대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파도의 다양한 이미지를 표현하기 위해 흰색과 회색 등의 물감을 적절하게 섞어 사용하는 것이 좋다.
그림에서 표현하고 싶은 것은 등대가 있는 언덕에서 바라보는 아득한 수평선과 노을 지는 저녁 풍경, 그리고 파란 하늘이 그려내는 몽환적인 풍경이다. 세부적인 묘사가 아직 부족하고 색감 표현이 자연스럽지 않은 한계가 보인다. 선생님이 늘 지적했듯이, 대상의 경계면에서 색칠이 자연스레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색으로 확연히 구분되는 어색함이 보인다. 앞으로 이 점을 개선해서 대상과 대상 사이의 색감이 자연스레 이어지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