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16일(월)
'산이 높아야 범이 살고, 물이 깊어야 용이 산다'고 했지만
‘산이 높아야 범이 살고, 물이 깊어야 용이 산다.’는 말이 있다. 자고로 산은 높아야 오를 맛이고, 물은 깊어야 헤엄칠 맛이 난다. 그래서 사람들은 높은 산을 찾고, 깊을 물가에 배 띄우기를 좋아한다.
그렇지만 도시 생활은 늘 바쁘고 실속 없이 분주하다. 멀리 높은 산을 찾고 깊은 물을 즐기기에는 늘 마음이 부대낀다. 제대로 결심하고 먼 길 떠나기가 쉽지 않다. 그러니 틈나는 발길 닿는 산이라도 찾는 게 슬기로운 도시 생활이다.
인천 남동구에는 만월산과 만수산이 있다. 물론 이것 말고도 몇 개의 산이 더 있다. 산이라 이름 붙긴 했지만, 강원도의 높은 산과 비교하면 턱도 없이 낮다. 만월산이 187.1m이고 만수산 201미터다. 산이라 이름 붙이기 살짝 민망하다. 아마 인천이 바닷가 도시라 웬만한 봉오리가 있으면 산이라 이름을 붙였나 보다.
만월산과 만수산은 가까이 붙어 있다. 두 산을 오른다 해도 700~800미터 이상의 산언덕을 두 개 넘는 정도에 불과하다. 두 산을 모두 산행한다 해도 두어 시간 남짓하면 충분하다. 도시 사는 사람들이 소일삼아 휴일 한나절 보내기에는 제격이다. 산을 내려올 때면 곧 다시 찾게다 결심하지만 이마저도 작심삼일에 그친다. 막상 다음 휴일이 오면 어느새 그 마음이 사라지고 그저 핑계거리 찾느라 분주하다.

그래도 가끔 시간이 날 때면 두 산을 오른다. 지난주 일요일 오랜만에 이곳을 찾았다. 만월산 초입에는 약사사란 오래된 절이 있다. 사찰이 마을과 붙어 있어 속세와 절간의 경계가 모호하다. 그대로 사찰 경내로 들어서면 엄숙함과 경건함을 만끽할 수 있다. 약사사 옆길로 난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금방 정상과 만난다. 느긋한 걸음으로 쉬엄쉬엄 올라도 20분이면 족히 태극기가 휘날리는 만월산 정상에 도착한다.

만월산이 아무리 낮다 해도 처음부터 끝까지 계단 길이다. 오르막을 계속 올라야 한다. 20분도 채 걸리지 않지만, 대부분 길이 계단이라 오르는 고통은 감수해야 한다. 하긴 명색이 산인데 그 정도 고생하지 않고 오른다면 재미가 없다. 8월의 등산은 땀을 한 바가지 이상은 좋게 흘린다.
그나마 산세가 작 다보니 한 번에 오르막 계단을 걷기만 하면 된다. 계곡도 없고 산의 높낮이도 없다. 꼭대기 바로 밑에 야트막한 평지가 나온다. 그곳에서 늘 커피를 파는 아주머니가 있다. 오가는 등산객들이 땀을 식히며 커피나 차를 마시며 환담을 나눈다. 옆 벤치에 앉으면 그들이 살아가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온다. 는다. 산중턱의 길거리 카페라고 하면 좋겠다. 비 피할 예쁜 그늘막까지 있어 그 나름의 운치가 있다.

만월산 정상에는 돌로된 표지석이 있다. 그 옆에는 높은 깃대 위에 달린 태극기가 있다. 마침 오늘은 바람이 제법 불어 태극기가 가볍게 날린다. 그야말로 하늘 높이 아름답게 펄럭인다.

만월산에서 내려오는 산길은 평탄하다. 만수산 쪽으로 걷다보면 운동 기구가 몇 개 놓인 중턱을 만난다. 이곳 벤치에 앉아 커피를 마신다. 아침에 떡 가게에 들러 산 가래떡 하나를 빼서 먹는다. 오늘은 바람도 제법 불어 산속 휴식이 꿀맛 같다. 매번 이곳에서 자주 이런 여우를 가질 것이라 속절없는 약속을 한다.
이곳을 떠나 계단을 따라 내려간다. 곧이어 만수산으로 가는 연결 다리가 나온다. 만수산과 만월산의 허리를 뚫어 도로를 만들었다. 등산객을 위해 도로 위에 육교를 놓았다. 아치형의 하얀 철제 난간이 예쁜 다리다. 8월의 더위에 지친 등산객의 눈을 맑게 해준다.

아기자기한 다리를 건너면 곧장 이정표를 만난다. 만월산 정상과 만수산 정상의 갈림길이다. 누가 보면 태백산맥 준령의 갈림길인 줄 알겠다. 하긴 사진으로만 본다면 제법 유장한 산세가 느껴진다. 사진이나 영상은 최고의 이미지만 보여준다. 그래서 사람이 쉽게 착각하지만, 이 정도는 애교로 봐줄 만하지 않을까.

갈림길에서 내려오면 지하도로가 나온다. 이곳을 지나 조금만 걷다 보면 만수산 초입의 도롱뇽(되롱龍) 마을입구가 나오다. 제법 거창한 입간판이 나를 맞이한다.

“아니 도시 근교에 웬 도롱뇽 마을?” 혼잣말을 한다. 생뚱맞게 느껴졌다. 알고 보니 계곡물이 맑아 도롱뇽이 많이 서식하는 곳이라 보호구역으로 지정했다. 물가로 내려가지 못하게 울타리를 쳐놓다. 먼발치에서 내려 보니 용들이 물아래 숨었는지 보이지 않는다. 도롱뇽도 용(龍)이라 이름 붙은 걸 보니 만수산이 만월산보다 높고 깊나 보다.


산이 높아서가 아니라 신선이 살면 유명하고, 물이 깊어서가 아니라 용이 살면 영험하다.
만수산은 만월산보다 산세가 크다. 마을에서 떨어진 곳이라 그런지 산이 그리 높지 않은데도 속세와 멀리 떨어진 느낌이다. 도롱뇽 서식지에서 산중턱까지 계곡이 이어진다. 며칠 전 내린 비로 계곡에서는 물 흐르는 소리가 제법 크게 들린다. 평소 사람이 잘 다니지 않은 산길에는 매미 소리만 우렁차다. 떼 지어 목청껏 우는 건지 아니면 신난다고 합창하는 건지 알 수 없다. 산의 고요함을 깨우는 건 매미들의 합창뿐이다.

아무리 낮아도 산은 산이라 했던가, 제법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오른다. 초록 잎을 머리에 진 나무들이 시원한 그늘을 만든다. 덕분에 한여름 더위에도 햇살을 피할 수 있다. 다행히 오늘은 짙은 구름이 드리워 해가 나지 않아 산을 오르기가 그나마 한결 쉽다. 쉬엄쉬엄 만수산 허리를 밝으면 정상에 오른다. 나는 만수산 정상 바로 밑에서 인천가족공원 방향으로 길을 살짝 틀었다.
정상에서 옆으로 내려오면 포장도로다. 정상 근처 도로가 옆길에 서면 인천 공원묘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햇살 곱게 내리는 산 아래에 비석들이 줄지어 서 있다. 직사각형의 묘비에 하얀 대리석 갓을 씌운 비석들이 열병식을 벌인다. 날이 더운 탓인지 조문객이은 찾을 수 없다. 온통 고즈넉한 침묵만 흐른다. 오늘은 짙은 구름이 드리워서 태양을 피할 수 있어 좋다. 이런 날은 8월이라 해도 영혼들이 단잠 자기에 좋다.
수많은 묘비를 보면서 이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하는 궁금증이 든다. 지금은 다들 반 평도 채 되지 않는 공간에 이렇게들 누웠다. 물론 제법 규모가 큰 묘에는 둘레석과 석등을 세운 곳도 있다. 그런 몇 군데를 제외하면 공원의 묘지는 누구에게나 크기가 같다. 생전에 부귀영화의 크기와 상관없이 같은 크기의 공간에서 영원한 잠을 잔다. 그렇지만 사연의 크기는 천차만별일 것이다. 천 년도 더 살 것 같이 아등바등 그렇게 살았을까? 아니면 학처럼 우아하고 고고한 삶을 살다 갔을까?
따지고 보면 삶은 항상 기쁨으로 가득한 건 아니다. 떠난 이들은 다들 고만고만한 상처들을 간직했다. 누구의 고통이 덜하고 더할 것 없이 아픔 없는 삶은 없었을 것이다. 각자의 기쁨과 슬픔을 모두 뒤로 한 채 양지바른 공원에 함께 누었다. 이제는 일체의 고통을 잊은 채 편안하게 깊은 잠에 빠졌다.
당나라의 천재 학자인 유우석(劉禹錫 772~842)은 ‘누실명(陋室銘)’이란 글에서 “산이 높지 않아도 신선이 살면 명산이고, 물이 깊지 않아도 용이 살면 영험하다”라고 말했다. 비록 자신이 사는 곳이 누추해도 덕은 향기롭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렇게 본다면 만수산 기슭에 수많은 영혼이 고이 잠든 것은 높아서가 아니라 영험해서 일 것이다. 이곳에서 죽은 이들은 자리 잡은 터가 작다 해도 생전에 못 다한 덕을 쌓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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