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15일
기억은 설명이고 추억은 삽화다.
한참 시간을 거슬러 가보자. 그때는 틈만 나면 친구들과 뛰놀고 쏘다니기 바빴다. 밥숟가락만 놓으면 쏜살같이 밖으로 내달렸다. 그러다가 해가 지고 어둑해지면 집으로 돌아온다. 그 시절은 왜 그리 하루해가 짧은지 의아했다. 적어도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까지 온종일 노는 데만 정신이 팔렸다. 잘 노는 것이 삶의 보람이라 느낄 정도였다. 이 시절의 이야기는 세월의 삽화가 되어 고스란히 추억으로 남았다.
기억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흐릿해지고 가물거린다. 세월이 한참이나 흐르고 나면 사람의 얼굴이나 이름이 머리에서 흔적 없이 사라진다. 그렇게 잊히는 것은 기억일 것이다. 이처럼 시간의 흐름은 기억을 닳게 한다. 기억은 먼 옛날 찍어둔 사진처럼 빛이 바래고 낡고 희미하다.
추억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또렷이 떠오른다. 세월에서 한참이나 멀어진 일들이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오히려 그 시절을 선명하게 떠올린다. 신기하다.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이 닳고 빛이 바랜다. 그런데 추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색깔이 선명하다. 삶에 지치고 외롭다고 느낄 때 가끔 꺼내 시간의 붓으로 색칠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기억이 설명이라면 추억은 삽화다. 지난날 있었던 일이 맞나 틀리느냐를 따지는 것은 기억이다. 그때의 장면을 설명하는 텍스트를 기억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사람마다 삶의 고비가 없을 리 없다. 구곡간장 미어지는 사연 한둘 가지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 애써 외면하고 싶은 이야기들은 기억 저장소에 긴 설명문으로 남는다.
추억은 설명이 아니라 그림이다. 그것도 삶의 긴 이야기 가운데 중간마다 등장하는 삽화라 이름 해도 좋다. 추억은 시간의 붓으로 해와 달을 물감 삼아 잘 섞어 그린 삽화다. 틈날 때마다 꺼내 새로 붓질하느라 이야기가 덧붙여졌을 것이다. 그래도 원판 그림은 그대로 남았으니 굳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더 아름답게 색칠했고,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바라본 옛이야기라고 하면 될 것이다.
산골의 사계
외가는 합천군에서도 산골에 자리한 마을이다. 마을 앞뒤로 산에 자리하고 있어 낮에도 해가 잘 뜨지 않는 곳이다. 밤나무가 지천으로 자라 가을이면 밤이 넘쳤고, 마을에는 밤을 보관하는 큰 창고가 있다. 얼마나 밤이 많았으면 마을을 ‘밤무지’라 별칭으로 부를 정도였다. 서쪽 골짜기 갓개울, 남쪽 등성이 갓등, 서북 골짜기 개산골, 서북쪽 등성 구들비등, 박실마을로 넘어가는 고갯길 구들비재. 봄에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는 꽃받등, 남쪽의 새앙재골 등 셀 수 없는 고개와 등성이 산 너머 마을로 이어진다. 원두동으로 가는 질등재, 동남쪽 골자기 약골, 볼머골 등 아직 세지 않는 고개들이 즐비하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는 바람에 가뜩이나 가난한 시골 살림이 더 쪼그라들었다. 한 입이라도 덜 요량으로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까지 몇 년을 외가에서 자랐다. 외가라 해서 본가보다 살림살이가 딱히 나은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외삼촌들이 다 장성해서 코흘리개 하나 건사할 정도는 되었다. 그렇다 보니 어린 시절 추억 대부분은 외가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들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할 것 없이 산골 마을은 사계절 내내 온통 놀이터였다. 봄과 가을은 이 골짜기와 저 산등성울 넘나드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봄이면 지천으로 핀 봄꽃 향기에 취했다. 진달래의 꽃받등에 올라 참꽃을 따 먹느라 정신없었다. 가을이면 커다란 모과나무가 있는 개산골이 놀이터였다. 가을 깊은 산등성이에 누워 하늘을 보곤 했다. 단풍이 온산을 붉게 물들인 산기슭에 누워 인디고 짙은 하늘을 올려다보곤 했다. 더디게 흐르는 구름만큼이나 시간도 느릿느릿 흘렀다.
그때 겨울은 얼마나 추운지 아랫실못이 겨울철 내내 꽁꽁 얼었다. 이곳은 짧은 겨울 햇살에 애타는 꼬맹이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겨울 놀이터가 된다. 외삼촌이 만들어준 썰매를 타느라 겨울 한낮을 금방 보냈다. 해가 뉘엿뉘엿 질 때까지 뛰어놀기만 해도 하루해가 짧은 시절이었다. 그때 그 친구들은 어디서 무얼 할까. 옆을 스쳐지나도 얼굴조차 알 수 없고 어렴풋이 이름만 입에서 맴돈다. 다들 어느 하늘 아래 선가 잘살고 있으리라 기도한다.
한겨울 휘영청 달이 밝은 밤 문풍지 바른 문을 열면 마당에 하얀 눈이 소복이 쌓였다. 작은 외삼촌을 따라 볼머골로 토끼 사냥을 나간 것도 그때의 추억이다. 이른 아침부터 쏟아지는 잠을 멀리하고 따라나선 까닭은 덫에 걸린 토끼와 꿩을 잡는 즐거움 때문이다. 그런 날이면 저녁 밥상에 맛난 고기가 푸짐하게 올라온다.
그 여름의 삽화
삼복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날이면 동네 꼬맹이들은 신이 났다. 더위 먹는 걸 아랑곳하지 않았고 쏘다녔다.
“우와!! 정말 덥다.”
“찐다! 쪄!!”
문밖을 나서면 훅하고 더운바람이 주눅 들게 만든다. 눅눅한 습기를 한껏 머금은 한낮의 열기가 제대로 사람을 지치게 한다. 뜨겁게 달구진 양철지붕에다 계란 반숙을 함직도 하다. 땅에 뿌리를 둔 모든 것들이 더위에 지쳐 흐느적거린다.
어릴 적 산골 외가 동네에는 신작로가 있었다. 그 길에는 키 큰 군인들이 열병하듯 미루나무들이 서 있었다. 하루 한 번 오는 버스가 들어올라치면 동네 꼬마들이 꽁무니 빼고 따라갔다. 먼지 풀풀 거리는 그 길을 뭐가 그리 좋은지 신나게 뛰어다녔다.
여름 한낮 신작로에 들어서면 매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나뭇가지에 매미들이 합창이라도 하는 날이면 귀가 따갑다. 그런 날이면 미루나무도 더위 먹은 듯 잎들이 축축 늘어졌다. 해가 길 한가운데로 오면 마을은 깊은 침묵 속에 빠져들곤 했다. 시끌벅적하던 시장 골목도 이때만큼은 깊은 잠 속에 빠져든다.
이런 날은 시곗바늘도 더위에 지쳐 한참이나 느려진다. 어른들도 잠시 농사일을 멈추고 어디선가 더위를 시킨다. 꼬마들은 이미 개울가에 진을 치고 신나게 자맥질을 한다. 지금이야 개울이라 말하긴 그렇지만, 그땐 꽤 물살이 힘자랑했다. 장마 끝난 개울은 한여름 동네 꼬마들의 수영장으로서는 제법 실한 모양새다.
“이 얏! 첨벙~~”
“아휴 시원하다!!”
동네 개구쟁이들이 홀라당 알몸으로 물가에 뛰어든다. 송사리를 잡느라 이리저리 물을 헤집는 놈과 물방개를 찾느라 물풀을 흔드는 놈들로 물가는 시끌벅적하다, 영악한 아이는 집에서 가져온 개구리참외를 물속에 숨겨 놓고 제법 기특한 미소를 짓는다. 여자아이들도 한쪽에 모여 치마를 걷고 물장난을 친다. 개중 암팡진 여자아이는 속옷 차림으로 냅다 물속에 뛰어든다. 시원한 소나기라도 뿌릴라치면 너도나도 입을 한껏 벌려 빗물을 맛보기도 한다. 시끌벅적한 동네 개울가의 여름 한낮은 그렇게 지나간다.
옛이야기
아침을 물리자 댓바람으로 물가로 뛰어나온 아이들은 배가 출출해져야 늦은 점심을 먹으러 집으로 들어온다. 그때야 가난을 이웃하며 사는 처지라 변변한 찬거리가 있을 턱이 없다. 시장이 반찬이라 다들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뚝딱 밥을 먹어 치운다.
밥상을 물리기가 무섭게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오후를 어떻게 보낼까 하고 연신 눈알을 굴린다. 집 밖 공터로 아이들이 하나둘 모여든다. 오후 반나절은 학교 운동장에서 공차기나 술래잡기로 시간을 보낸다. 걱정이나 근심이란 놈이 끼어들 틈이 없는 어린아이들은 마냥 여름이 즐겁기만 하다.
이때쯤이면 동네 어귀 수박밭이랑 참외밭에는 여름 향기가 익어간다. 아이들은 과일이 익어갈 때 입맛을 다시곤 했다. 한여름 밤 달이 뜰 때면 아이들은 그간의 은밀한 작전을 실행에 옮긴다. 논두렁을 타고 살살 기어가 어른 머리통만 한 수박을 가슴에 가만히 안는다. 심장 소리가 원두막까지 들릴까 숨죽이며 엉금엉금 기어 개울가에 모여 앉아 입맛을 다신다. 그런 날 아이들은 오줌을 누느라 한밤중에 깨기 일쑤다.
이제는 엄두도 못 낼 일이다. 아니 지금은 가게에 가면 얼마든지 수박을 맛볼 수 있다. 굳이 야밤에 그런 모험을 벌일 필요조차 없다. 먹을거리가 지천으로 깔린 지금을 궁핍하던 그 시절과 견주는 것조차 어리석다. 이런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해봤자 그저 눈만 껌벅이거나 재미없다고 금방 자리를 뜬다. 추억은 추억으로만 남겨야지 그걸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곰팡내 나는 옛이야기가 된다. 그래서 가끔 혼자 꺼내 보고는 다시 추억 창고에 곱게 집어넣는다.
이렇게 무더운 날이면 어릴 적 외가에서 보냈던 여름이 생각난다. 누구나 그런 아련한 어린 시절을 가슴에 품고 산다. 지금은 아득한 옛이야기가 되었다. 하도 오래전이라 기억은 아득하고 추억만 남았다. 기억도 선택적이지만 기억 중에서도 좋은 것만 추려 시간의 붓으로 멋있게 색칠한 추억이다. 그 여름날의 삽화로 남았다.
얼마 전 외가 동네를 찾았다. 신작로도 개울도 작아도 너무 작다. 아니 그곳은 그대로인데 내가 훌쩍 큰 탓이다. 복스럽든 초가지붕이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 마을은 여전히 오지로 남았다. 아스팔트가 깔려 오가기에는 한결 편해졌다. 언제 다시 올 거라는 속절없는 약속을 남기고 그 여름의 추억과 작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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