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풍이 몰아치는 겨울 앞에
없는 사람 지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 연말 한파가 몰아친다. 시베리아 들판을 가로질러 온 찬바람이 잔뜩 화가 났다. 한겨울의 바람이 날이 파랗게 선 칼날처럼 스치듯 얼굴을 찌른다. 해가 저물면 사람들은 바쁜 걸음으로 따듯한 온기를 찾는다. 가족 품으로 가는 사람도 있을 테고, 술이라도 마실 요량으로 친구들과 술집을 찾는 이도 있다. 다들 깊어가는 겨울밤과 저무는 해를 두고 이런저런 사연을 왈칵 토해낸다.
상인들은 한 해를 결산하고 장부를 정리한다. 수익을 남긴 사람은 따뜻한 등불 아래 만찬을 즐기고, 손해를 본 사람은 찬바람에 꽁꽁 언 마음으로 집으로 가는 발길을 재촉한다. 누구에게는 분명 좋은 해였고, 누구에게는 억세게도 재수 없는 해였을 것이다. 되는 일 하나 없는 나도 썩 반갑지 않은 올해가 무사히 가길 바랄 뿐이다. 오는 새해는 좋은 운이 들어오길 소심한 마음으로 기원한다. 삭풍이 몰아치는 겨울 앞에 몸과 마음을 추스러야 그런 새해를 기대할 수 있다.
연초에 세웠던 계획을 성실하게 실천했다. 계획대로라면 제법 근사한 성과를 거둬야 하는데, 웬걸 손에 쥔 게 하나 없다. 이렇게 될 걸 뭐 하려고 그리 아등바등했을까 회의가 밀려온다. 그렇다고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면 편했을까? 결실을 거두지 못해 올린 소출이야 없지만, 왜 안 된 건지 어렴풋이 짐작을 할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성과를 거뒀다고 위로해야 한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년을 어찌 기약하며, 어찌 씨앗을 새로 뿌릴 수 있을까.
느릿느릿 세상 끝 바다로 갈 거라고
세상은 빠른 속도로 움직인다. 지구도 시속 1,300km의 빠른 속도로 하루 한 번씩 회전한다. 사람들은 늘 분주하고 바쁜 걸음이다. 신호등 불이 꺼질라치면 저 멀리서부터 뛰어온다. 다음 신호를 기다리면 될 텐데 그걸 참지 못한다. 현대인은 단 몇 분도 진득하게 기다리지 못하고 늘 허둥거리며 바삐 산다. 남들한테 뒤처질까 조바심에 전전긍긍한다.
느릿느릿 세상 끝 바다로 기어가는 달팽이를 본받자. 평생 헤어날 수 없는 커다란 짐을 지고서 쉬지 않고 어디론가로 향한다. 달팽이는 후진을 모르고 오직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날이 새파랗게 선 칼날 위도 마다하지 않고 기어가는 달팽이의 직진 본능을 배우자. 어떤 험난한 일이 닥치고 고통이 가로막아도 달팽이는 포기하지 않고 전진한다. 장애물을 타고 넘으면 천천히 끊임없이 전진하는 달팽이를 보며 나는 지친 삶의 위안을 얻는다.
달팽이의 움직임은 무척 느리다. 등에다 집을 한 채 지고 가니 속도가 더딜 수밖에 없다. 느리지만 천천히 착실히 제 갈 길을 가는 달팽이가 속삭인다. 늘 바삐 서두르고 조급한 우리에게 조금 천천히 간다고 문제 될 것 없다고 말한다. 조금만 여유 있게 살면 훨씬 마음 편할 거라고 위로한다.
달팽이의 마음을 이야기한 시와 노랫말을 들어보자. 도종환의 시 '달팽이'와 가수 이적의 노래 '달팽이'의 일부이다.
달팽이(도종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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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가 속도의 논리로만 달려가는 세상에
꽃의 속도로 걸어가는 이 있다.
온몸의 혀로 대지를 천천히 핥으며
촉수를 뻗어 꽉 찬 허공 만지며
햇빛과 구름 모두 몸에 안고 가는 이
우리도 그처럼 카르마의 집 한 채 지고
아침마다 문을 나선다.
등짐 때문에 하루가 휘청거리기도 하지만
짐에 기대 잠시 쉬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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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이적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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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욕조 속에 몸을 뉘었을 때
작은 달팽이 한 마리가
내게로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속삭여줬어
언젠가 먼 훗날에 저 넓고 거칠은
세상 끝 바다로 갈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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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날 위로 전진하는 달팽이
달팽이는 배를 밀려 이동한다. 등에는 집을 짊어지고 앞으로 나아간다. 달팽이의 몸과 피부는 무척 연약하다. 피부가 약하고 말랑말랑한 게 금방이라도 상처를 입을 것 같다. 이렇게 약한 피부를 가진 달팽이가 시퍼렇게 날이 선 칼날 위를 쓱쓱 기어간다.
살아가는 일은 평생 무거운 집을 머리에 이고 가는 달팽이를 닮았다. 낑낑거리며 느릿느릿 기어가는 달팽이를 보면, 마치 나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안쓰럽다. 더군다나 날카로운 칼날 위를 넘어가는 달팽이는 격랑의 세월을 건너는 사람과 다름없다. 오직 자기 힘만으로 시련을 극복하고 칼날 위를 넘어야 한다. 그것도 후진하지 않고 오직 전진만 있을 뿐이다.

달팽이는 아무리 날카로운 칼날 위라도 안전하게 기어간다. 놀랍게도 달팽이의 피부나 배에는 상처 하나 없고 깨끗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비밀은 달팽이 몸에서 나오는 끈적끈적한 점액질인 뮤신(mucin)에 있다. 달팽이는 끊임없이 뮤신을 내보낸다. 달팽이가 면도날이나 칼날 위를 기어갈 때 몸에서 나오는 뮤신이 천연 보호막이 된다. 한순간도 쉬지 않고 자신을 지켜내는 달팽이의 생존 본능이 정말 대단하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우리가 산다는 것은 서슬 퍼런 칼날 위를 기어가는 것과 같다. 등에다 무거운 짐을 이고 기어가는 달팽이와 닮았다. 한순간이라도 긴장을 늦춘다면 무너진다. 직장인들은 믿을 건 오직 경제력이라 삶은 팽팽한 긴장감의 연속이다. 결혼해 맞벌이한다고 해도 별반 나을 것이 없다. 다 거기서 거기다.
달팽이의 뮤신처럼 우리 자신을 보호할 뭔가를 가져야 한다. 직장 다닐 때는 그래도 안심이 된다. 구조조정을 당하거나 퇴직이라도 하면 절단이다. 전문가들은 제2의 삶을 살라고 권유한다. 말처럼 쉬우면 참 좋겠다. 설령 나름 준비했다 해도 냉혹한 현실에서 성공하기가 어렵다. 하긴 제1의 인생을 사는 사람조차 목숨 걸고 노력하는 판에 경쟁은 더 심해진다. 힘들고 서러워도 우리는 버티고 끝끝내 살아남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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