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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의 미학

올해도 나는 고도(Godot)를 기다린다.

by 전갈 2023. 1. 1.

새해를 맞는 의식을 치르고

 

"다섯, 넷, 셋, 둘, 하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어제는 연말 나들이 겸해서 가족과 점심을 먹었다. 집으로 오는 길에 코스트코에 들러 레드 와인을 샀다. 딸아이가 미리 준비해둔 케이크와 와인 그리고 치즈와 빵을 담은 접시를 테이블 위에 세팅했다. 한 해를 마감하는 카운트가 시작되자 2023의 초에 불을 붙였다. 해가 바뀌자 촛불을 끄고 레드 와인을 마신다. 그렇게 조촐하게 2022년을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의식을 치렀다.  

 

2023년의 첫날 아침이 밝았다. 새로운 365일이 시작됐다. 올 한 해 동안 지구는 365번 자전하고, 태양을 향해 한 번 공전할 것이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지구가 회전하는 속도는 시속 약 1,670km이다. 거기다가 무려 시속 약 107,226km의 빠른 속도로 나아간다. 정신없이 어지러울 만도 하지만 우리는 잘 버텨낼 것이다.

 

지구가 이렇게 바삐 움직이는 사이에 우리는 많은 일들을 새로 경험할 것이다. 개중에는 분명 좋은 일도 있고, 궂은일도 있을 것이다. 누구나 좋은 일만 생기길 바라는 마음으로 시작하는 첫날이다. 그날들이 쭉 이어져 365일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새로운 날을 맞는 설렘과 희망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순간, 문득 아일랜드 출신의 소설가 사무엘 베게트(Samuel Beckett, 1906~1989)가 생각났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의 희곡 '고도(Godot)를 기다리며'가 떠올랐다. '고도(Godot)'라는 낯선 단어가 주는 모호함과 '기다리며'라는 주는 설렘이 새해 첫날의 분위기와 왠지 묘하게 맞아떨어지는 느낌이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사무엘 베케트가 1952년 발표한 희곡이다. 이 작품으로 베케트는 단숨에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극 중에서 사람들은 누군인지도 모르는 고도를 50년이 되도록 기다린다. 아무런 약속도 없고 오리라는 기약도 없는 그를 기다리는 상황이 궁금했다.

 

이 연극에는 다섯 사람이 등장한다. 그래봤자 중간에 잠시 두 사람이 나오고, 마지막에 고도가 오지 않는다는 소식을 전하는 소년이 짧게 등장한다. 무대 장치라고는 고작 나무 한 그루뿐인 불편한 연극이다. 게다가 연극 내내 주인공 두 사람이 ‘고도’라는 사람을 기다려야 한다는 말과 맥락 없는 대화만 끝없이 주절거린다. 그들은 ‘고도’가 누군지 모르고 끝내 고도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들은 50년 동안이나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렸다. 이 정도 시간이면 사람의 인생과 맞먹는다. 기다리는 동안 이들은 끊임없이 아무 의미도 없는 대화를 이어간다. 마치 우리의 삶이 기다림의 연속이고 허무하고 맥락이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래서인지 이 연극은 묘하게 사람 마음을 끈다.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무언가를 기다리는 자신을 생각하며 사람들은 감동한다.

 

삶은 기다림이다.

이 연극은 인생의 기다림을 비유적으로 표현했다. 마치 무언가 될 것 같은 희망과 누군가 와줄 것 같은 바람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습과 닮았다. 언제 올지 알 수 없는 무언가를 기다리는 우리 자신을 표현한 것이다. 새해가 되면 우리는 기도하고 소망을 빈다. 계획을 세우고 꿈을 꾼다.

 

각자 무언가 이루고 싶은 것들이 있다. 고도를 만나지 못해도, 꿈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우리는 살아간다. 기다리는 것 말고는 달리 기대할 게 없다. 기다리는 순간만큼은 행복하기에 우리는 성실하게 최선을 다한다. 그것이 인생이고 삶이기 때문이다.

 

사무엘 베케트는 1937년 프랑스 파리에서 생활을 시작했다. 불과 2년 뒤인 1939년 2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나치가 파리를 점령했다. 그는 고국인 아일랜드로 돌아가지 않고 파리에서 레지스탕스로 활동했다. 체포의 위험을 감지한 그는 남프랑스 한 농가에 피신했다. 그곳에서 낮에는 지하에 숨고, 밤에만 잠시 나오는 불안한 생활을 이어갔다. 앞날을 기약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는 고도(Godot)를 기다렸다.

 

베케트보다 나은 형편인 우리는 모두 뭔가를 기다릴 것이다. 그렇듯이 나는 올해도 고도를 기다릴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그것이 행복일 수도 있고, 아니면 성공일 수도 있다. 어릴 때는 막연히 뭔가 되겠지 하고 기대했다. 어른이 돼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뭔가를 꿈꾸기도 했다. 아직 나타나지 않는 희망의 공소시효는 없다. 오지 않았고 언제 온다는 약속도 없지만, 나는 지금도 기다린다.

     

우리는 만남을 목적으로 한 기다림에 익숙하다. 누군가 오리라는 기대를 안고, 무언가 될 거라는 희망을 안고 산다. 뭔가 되리라는 바람으로 고통의 시간을 견딘다. 오늘 아침 사람들은 각자의 꿈을 그릴 것이다. 목표를 세우고 계획을 설계할 것이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비장한 각오를 가슴속에 새긴다. 모두가 의미 있게 시작하는 새해 첫날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