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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의 미학

양양 바닷가 작은 승강장

by 전갈 2023. 2. 5.

설렘을 채운 여행 가방 

지난 11월 초 주말 강원도 양양 현불사를 다녀왔다. 먼 길을 갈 때는 운전하지 않고 시외버스나 기차를 자주 이용한다. 다가왔다 밀려가는 풍경 보는 재미가 쏠쏠하고, 더디게 가면 볼 수 있는 게 더 많아진다. 이번에도 버스를 타고 가기로 하고 차 편을 검색했다. 다행히 내가 있는 도시에서 양양군까지 가는 직행버스가 있다. 아침 6시 20분에 첫차가 출발하면 약 2시간 간격으로 양양으로 버스가 떠난다.     

 

버스 여행을 하면 한 번에 갈 수 있는 데가 잘 없다. 늘 몇 번이나 차를 갈아타야 도착할 수 있는 곳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첫 번째 목적지인 양양터미널에 도착하면 다시 현남면으로 가는 양양군 버스로 갈아야 탄다. 약 40분 걸려 현남군 현남중 입구에서 내린다. 거기서부터 2.7km의 산길을 걸어야 한다. 산길이라 해도 논밭 사이로 난 야트막한 길이라 걷기에는 불편함이 없다. 집에서부터 계산하면,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걷는 것까지 얼추 9시간 가까이 걸린다.      

 

시간이 아무리 오래 걸린다 해도 여행을 갈 때면 늘 마음이 들뜬다. 8시간이 걸리면 어떻고 9시간 걸리면 어떤가. 이미 익숙해져 무료한 도시를 떠나 낯선 곳으로 간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앞선다. 그날도 한 가방 가득 설렘을 채우고 집을 나섰다.      

 

11월 초 아침 6시면 아직 동이 트지 않아 어둑하다. 이른 첫차지만 주말이라 사람들로 금방 자리가 찼다. 버스는 양양군에 들렀다가 종착지인 속초로 간다. 버스는 제시간에 양양터미널에 도착했다. 현남중으로 가는 버스는 하루 4번밖에 없다. 첫차는 이미 떠난 지 오래고 다음 버스 시간인 11시 21분까지 기다려야 한다.

      

자동차로 가면 휑하니 한 번에 갈 수 있지만, 버스나 기차 여행은 연결 시간을 딱 맞출 수 없다. 다음 목적지로 가기 위해서는 기다림과 떠남을 반복해야 한다. 더딤과 느림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기차나 버스 여행의 재미이다. 처음 계산할 때보다 시간이 더 걸리는 이유가 그런 기다림 때문이다. 그 기다림으로 주위를 찬찬히 둘러볼 수 있다는 것이 색다른 즐거움이다.      

 

대합실 밖으로 나와 하늘을 본다. 맑고 투명한 가을이 얼굴을 내민다. 하늘의 캔버스는 빈틈없이 온통 파란 물감으로 촘촘히 채웠다. 양양 바다의 파란빛을 하늘로 끌어왔는지 하늘색과 바다색이 하나다. 저 멀리 가을 겉이 끝난 들판이 아스라이 보인다. 차로 왔다면 놓쳤을 아름다운 가을 풍경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옛 것은 그렇게 사라진다. 

이곳 터미널은 새로 지어 이사 온 지 3개월 남짓 지난 터라 안팎이 깨끗하다. 예전 양양군 보건소 옆에 있던 건물이 너무 오래되어 새로 짓고 아예 외곽지대로 옮겨왔다. 양양이 그리 큰 도시가 아니라 옮겼다 해도 그리 먼 거리는 아니다. 이곳을 중심으로 새로 개발할 모양이다. 아직은 주위가 썰렁하고 건물만 덩그러니 서 있다.      

 

 

낡은 것은 새것에 밀려나는 게 밀려나게 마련이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정류장은 1980년의 풍경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곳에 서면 마치 시간 여행을 간 것처럼 옛 추억에 묻힐 수 있어 좋았다. 가물거리던 추억을 소환해 곱씹는 재미가 있었지만, 이제 그런 낭만은 사라졌다. 이방인의 눈에는 낡고 해진 것조차 아름다울지 모르지만, 이곳에 사는 이에게는 불편할 만도 했다. 스쳐 지나는 이의 우수만으로 버티기엔 세월이 야속하기만 하다.      

 

현대식 건물로 단장한 터미널에는 편의점이 들어섰다. 2층에는 전망 좋은 카페도 입점해 풍경만 보면 도시의 정류장이나 다를 바 없다. 대합실 안에는 드문드문 사람들이 앉아 머리를 맞대고 속삭인다. 높은 창으로 아침의 가을 햇살이 긴 꼬리를 드리운다. 이제 이곳도 없는 게 없는 문명이 들어찼다.      

 

정류장 밖 버스 승강장에는 마침 어느 도시로 떠나는 버스 두 대가 들어왔다. 저만치 떨어져 마을버스가 출발시간을 기다린다. 버스를 기다리는 군인이 벽에 기대 스마트 폰을 골똘히 쳐다본다. 휴가를 받아 고향으로 가는 길인 모양이다. 벌써 마음은 고향의 도시를 꿈꾸고 있을 것이다. 

 

한산한 터미널

 

몇 안 되는 사람들이 서둘러 버스에 올라탄다. 버스가 떠나자 승강장은 다시 텅빈다. 여름에는 서핑족으로 북적거리는 버스 터미널이지만, 가을 터미널은 한산하기 그지없다. 쓸쓸하면서도 고독한 풍경이 여행객의 마음을 제대로 사로잡는다.      

 

바닷가의 작은 승강장

11시 20분 양양군 12번 버스에 올랐다. 터미널을 출발한 버스는 양양군 이곳저곳을 들렀다. 아름답기로 이름난 하조대(河趙臺) 정자가 있는 해변 마을도 지난다. 하조대는 조선 초기의 재상을 지낸 하륜(河崙)과 조준(趙浚)이 조정에서 은퇴하고 말년을 보낸 정자 이름이다. 조준은 조선을 건국하는 데 큰 공을 세웠고, 하륜은 태종 이방원이 형제들을 죽이고 왕권을 잡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들은 한양에서 부와 명예를 한 몸에 쥐고 세상을 쥐락펴락했다. 말년에 고향인 강원도 양양으로 돌아와 풍광 좋은 곳에 정자를 지었다. 그렇게 지은 정자에 하 씨와 조 씨인 두 사람의 성씨를 따 하조대라는 이름을 붙였다. 탁 트인 동해와 절벽의 기암괴석이 일품이다. 정자에서 내려본 동해의 풍경은 차가워서 더 아름답다. 파도가 바위에 부딪쳐 부서지며 하얀 물보라를 뿌린다. 바위에 몸을 부딪치고 돌아서는 물빛이 짙은 에메랄드색이다. 너무 아파서 파도에 옥색이 들었나 보다.           

 

하조대를 돌아 버스는 이윽고 인구해변을 지난다. 인구해변은 붙어 있는 죽도해변과 함께 서핑의 성지라 불린다. 인구해변의 도로에는 늦가을 서핑을 즐기는 이들이 몰고 온 차들이 즐비하다. 주민이라 그래야 3,000명도 채 안 되는 시골에 서핑족으로 넘쳐난다. 한여름에는 수천 명의 사람으로 들썩이고 흔히 강남에서만 볼 수 있는 외제 차들이 즐비한 곳이 이곳이다. 젊음과 낭만이 여름밤 인구해변과 죽도해변을 수놓는다.      

 

해변 승강장

 

12시가 다 되어 현남중 앞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면 곧바로 해변이다. 바닷가 도로에 앙증맞은 버스 승강장이 있다. 바닷가 맞닿은 곳이라 낡아 녹슨 것조차 예쁘기가 한량없다. 오가는 사람 없고 하루 4번 버스가 서기에 벤치는 늘 비었다. 눈에만 묻어두기 아쉬워 몇 차례 사진을 찍었다.  

 

승강장 옆 작은 계단을 내려서니 짙푸른 동해가 나를 반긴다. 바닷바람도 반갑다고 얼굴을 만지다가 이내 머리를 헝클어 놓는다. 모래사장에 서니 끝 간데없는 바다가 하늘과 맞닿았다. 저 멀리 작은 등대가 서 있다. 철 지난 바닷가는 사람이 없어 쓸쓸하지만, 고독을 찾는 이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다. 한적한 시골 마을의 바닷가라 사람 그림자 하나 없다. 

 

한참을 바닷가에서 홀로 서성이다 다시 길을 재촉했다. 이제부터는 저수지 옆으로 난 길을 따라 한없는 가을 속으로 걸어갈 것이다. 그 이야기는 다음 글로 넘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