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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의 미학

물기 젖은 커피 향이 묵직한 아침

by 전갈 2023. 6. 26.
Pixabay

밤 짙게 드리운 구름이 그예 비를 뿌렸다. 도시의 회색 건물은 아직 게으른 잠에 빠졌다. 바람은 연신 나무를 흔든다. 가지에 매달린 잎들은 떨어지지 않으려고 힘을 잔뜩 준다. 가을의 단풍과 달리 여름의 초록은 힘이 튼실해서 잘 떨어지지 않는다. 온통 초록이 주르륵 흘러내릴 것 같은 여름 숲이 비에 젖었다.   

   

빗방울이 화단에 부딪혀 흩어진다. 풀잎들은 제 세상 만난 양 빗물로 단장한다. 나뭇잎은 내리는 비로 얼굴을 씻는다. 도시의 소음과 먼지로 덕지덕지 낀 때를 말끔히 씻어 낸다. 덕분에 해사해진 초록의 얼굴로 배시시 웃는다. 이런 날은 풀잎 자라는 소리도 크게 들린다. 본격적인 한여름의 광폭한 더위를 앞두고 내리는 비는 한결 여유가 있다.      

 

도시는 비의 축제가 열린다. 차들이 지나는 자리엔 물방울이 튄다. 까만 우산 사이로 드문드문 노랑과 빨강 우산이 춤추듯 걷는다. 길을 나선 사람들은 종종걸음 걷는다. 바람이 불라치면 빗방울이 후드득 흩날린다. 행여 옷이 젖을까 우산 쥔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간다. 이런 날은 거리도, 마음도 비에 젖는다.        

   

물 튀는 길을 나서는 일이 번거롭다. 그래도 비다운 비가 왔으면 좋겠다. 나 좋다고 너무 많은 비가 내리면 살기 팍팍한 사람들을 힘들게 한다. 그래서는 안 될 일이다. 선술집 낡은 지붕에서 들려오는 빗소리를 들으며 술을 마셔도 좋은 정도로 비가 오면 좋겠다. 파전을 안주 삼아 마시는 막걸리를 마셔도 좋다. 부족한 세로토닌을 보충해 준다니 어찌 이를 마다할 수 있겠는가. 

 

영화감독 우디 앨런은 “미드 나잇 인 파리”에서 비가 내리면 까무러치게 아름다운 도시가 파리라고 했다. 영화는 시작 후 약 3분 30초 동안 파리의 구석구석을 제대로 보여준다. 개선문, 샹젤리제 거리,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내려다본 파리, 루브르, 노천카페, 모퉁이의 예쁜 꽃집, 비에 젖은 파리의 거리, 밤의 에펠탑 등등 어느 한 곳 빠지지 않는 곳이 없다. 말은 없고, 오직 시드니 베셋(Sidney Bechet)의 재즈풍의 색소폰 연주가 아름다운 'Si Tu Vois Ma Mere'만 흐른다.        

 

비 오는 날 꼭 파리에 가야 하나. 그러면 좋긴 하지만, 비 내리는 풍경이 아름답지 않은 도시가 어디 있을까. 내리는 비에 꽃단장하는 도시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창으로 손 내밀어 빗방울을 맞아도 좋다. 다른 한 손에는 따뜻한 커피를 마셔야 한다. 그래야 제대로 비의 스케치를 감상할 수 있다.       

 

밤새 퍼붓던 비가 아침에는 잦아들었다. 물기 젖은 커피 향이 유난히도 묵직하다. 킬리만자로일까 아니면 볼리비아일까? 먼 이국의 깊은 산속의 커피 향이 내 방을 가득 메운다. 적도의 여름 태양이 얼마나 뜨거웠을까. 커피는 깊은 맛과 향을 낸다. 진하고 쌉쌀한 맛이 혀끝에 감긴다. 이렇게 비 오는 월요일 아침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