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5월 2일(월)
얀 반 에이크의 초록 물감

딸 아이와 경기도 광주 태화산을 올랐다. 곤지암 스키장에서 가까운 곳에 산이 자리하였다. 태화산은 높이가 해발 644m라 서울 근교에서는 낮은 산은 아니다. 널리 알려진 산이 아니라 그런지 등산객이 많지 않았다. 조용히 산행을 즐기기에는 더 할 나위 없다.
5월 산의 싱그러움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초록이 쏟아질 것 같은 숲을 허위허위 팔을 휘두르며 오른다. 싱그러운 생명의 냄새, 소나무의 짙은 향기, 나무들이 뿜어내는 아름다운 숲 냄새가 숲에 가득하다. 산을 오를 때 감내해야 할 고통이 끝내 달콤해지는 것은 바로 숲이 주는 아름다움 때문일 것이다. 아직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지 않아 공기는 가볍고 청량하다.
산은 초록의 바다로 변신 중이다. 나뭇잎을 문지르면 헐크처럼 초록 인간이 될 것 같다. 산에도 그림에도 초록이 넘친다. 한때는 초록 염료를 구하기 힘든 시절이 있었다. 그 옛날에는 주로 녹색 빛나는 돌이나 광물, 심지어 쇠에 붙은 녹을 갈아서 초록 염료를 만들었다. 그 중에서 구리 광산에서 나오는 공작석이라는 광물을 잘 빻아 만든 초록이 최고의 인기를 끌었다.
그때는 초록색을 내는 광물조차 구하기 무척 힘들었다. 당연히 초록 염료의 값이 이만저만 비싼 것이 아니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초록은 이집트의 파라오의 피라미드 벽화에나 초록을 사용할 정도로 귀하신 몸이었다. 화가들은 초록 염료를 쉽게 사용할 수 없었다. 한동안 그림에서 초록을 찾기 힘들었다.
13세기기 지나고 14세기로 접어들자 중세의 역사가 일몰로 사라졌다. 인간은 신의 땅에서 사람의 땅으로 내려왔다. 르네상스의 새벽이 밝은 것이다. 신의 영광을 그리던 화가들은 인간의 기쁨과 슬픔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제 거리낌없이 성숙한 여인의 아름다움을 캔버스에 담을 수 있었다.
벨기에 플랑드르 출신의 화가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5-1441)의 손을 통해 초록은 화려하게 비상했다. 에이크는 최초로 유화 물감을 개발한 화가다. 그의 붓끝에서 유화 물감의 초록이 아름다움을 마음껏 뽐낼 수 있었다. 1434년에 완성한 <지오반니 아르놀피이니와 그의 부인의 초상>이라는 그림에서 초록이 진가를 발휘했다.

태화산의 초록 물결
줄지어 선 나무들의 무성한 초록 잎이 따가운 5월 햇빛을 가려준다. 산을 오르는 동안도 그렇지만, 정상에도 숲이 우거졌다. 사방이 나무라 주변 경관을 볼 수 없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것 하나다.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 까닭은 주변 경관을 볼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산 초입부터 정상까지 숲의 깊은 침묵이 그만이다.

산은 높든 낮든 정상 오르기에는 숨이 막힌다. 산이라 이름 붙으면 힘에 부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태화산은 높이가 낮지 않고 계단이 많아 오르는 데는 꽤 호흡이 가빠진다. 그래도 다른 산에 비해 등산로가 길지 않아 비교적 수월한 편이다.
두어 시간 못 미쳐 정상에 올랐다. 정상에는 자연석으로 태화산 글귀가 새긴 돌비석이 서 있다. 바위의 결이 그대로 드러난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라 보기 좋았다. 몇 컷 사진을 찍었는데 자연석 결이 살아 있는 바위라 운치가 돋보인다.
하산하는 길에 담근 계곡의 물은 어찌 그리 시원한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깨끗하고 맑은 물에 손을 담그면 세상 피로가 다 가시는 기분이다. 며칠 전에 내린 비로 계곡에는 물이 콸콸 흐른다. 덩치 그리 크지 않은 계곡이라 이만한 물이라도 풍성하게 흘려보낸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서두르지 않고 순리대로 흐른다. 막힌 곳은 둘러가고, 높은 곳은 옆으로 비켜 간다. 그것이 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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