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5월 13일
부처님 오신 덕분에 얻은 한적한 휴일. 지방의 도시로 지인의 상가를 찾았다. 비가 많이 내릴 거라는 예보에 우산을 챙겼다. 목적지에 도착하니 비는 그치고 구름이 낮게 드리웠다. 먼지 씻긴 거리가 깨끗하다. 빈소가 있는 대학 병원까지는 아주 가까운 거리다. 같이 문상할 일행을 기다리느라 느긋한 휴식을 즐기며 역사 안을 둘러본다. 종종걸음으로 기차를 타러 가는 사람. 금방 차에서 내려 역사 밖으로 나가는 사람. 기차 시간표를 확인하느라 정신없는 군인 아저씨. 도시의 역사는 언제나 여행 떠나는 사람들로 붐빈다.
상가에는 아는 얼굴이 많아 서먹할 겨를이 없다. 권력의 한자리에 이름 올린 인사의 부친상이라 빈소가 시끌벅적하다. '정승이 죽으면 상가가 비지만 정승 집 개가 죽으면 문전성시를 이룬다'라는 옛말이 생각난다. 권력 주변에는 사람들이 차고 넘친다.
그들은 벌써 다음 권력을 꿈꾸고 얼굴에는 호탕한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그들은 치밀한 전략을 세워 권력에 도전할 모양이다. 그들에게는 다시 축배 들 일이 예정된 순서처럼 보인다. 이미 승리의 달콤함을 맛본 그들은 자신감으로 충만하다. 그런가? 세상일이 그리 쉽다면 모두 자신이 원하는 대로 다 되었겠지. 그런 생각을 접고 그들의 이야기에 고개만 끄덕였다.
이른 아침의 역사는 사람들로 붐빈다. 열차를 기다리는 플랫폼 천장으로 토닥토닥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서둘러 역으로 나오는 바람에 출발하려면 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남는 시간을 보내려 스티븐 킹의 'On Writing'을 꺼낸다. 우리말로 '유혹하는 글쓰기'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무엇을 유혹한다는 말인가. 글을 잘 쓴다는 것도 축복받은 일임에는 분명하다. 뛰어난 음악가의 천부적인 재능이 부럽고, 화가의 아름다운 붓질 솜씨 또한 얼마나 부러운가. 그렇듯 좋은 글을 읽을 때면 그런 재능을 가진 작가가 한없이 부럽다.
스티븐 킹이라면 생각나는 게 없다고? 그렇다면 영화 제목은 어떨까? 그린 마일, 쇼생크 탈출, 미저리 등 꽤 인기를 끌었던 영화들이 그의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 미국에서 엄청 유명한 공포 소설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On Writing'에서는 자신이 소설가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소개하고, 글쓰기 요령을 깔끔한 문체로 설명한다. 아무리 작가가 친절하게 설명해도 타고난 소질이 없다면 그저 잡문이나 쓸 수 있다. 많은 훈련과 노력을 통해 일정 수준까지는 갈 수 있겠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글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
"..<뉴요커>와의 어느 인터뷰에서 내가 소설이란 땅속의 화석처럼 발굴되는 것이라고 믿는다는 말을 했을 때 기자는 내 말을 못 믿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안 믿어도 좋다, 다만 ‘내가’ 그렇게 믿는다는 것만 믿어주면 된다고 대답했다. 그 말은 사실이다. 소설은 선물용 티셔츠나 전자 오락기가 아니다. 소설은 이미 존재하고 있으나 아직 발견되지 않은 어떤 세계의 유물이다.“
스티븐 킹의 말처럼, 소설은 땅속의 화석처럼 발굴하는 것이다. 시는 깊은 바다에서 은빛 갈치를 건져 올린 일과 같다. 소설은 아직 발굴되지 않은 유물이고, 시는 아직 건지지 않은 활어라고 생각하면 될까? 유물을 알아보고 발굴하는 실력이 있어야 하고, 등 푸른 생선을 낚는 기술이 필요하다. 문제는 그것이다. 아무나 유물을 보고 발굴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바다에 낚싯대를 드리운다고 고기가 낚이는 것도 아니다. 천부적 재능이 없으면 뼈를 깎는 노력이 있어야 흉내라도 낼 수 있다.
기차 안에는 이미 많은 승객이 자리에 앉아 있다. 눈을 감고 잠에 빠진 아저씨, 텔레비전을 보느라 정신없는 청년, 옆 사람과 쉴 새 없이 수다를 떠는 여인, 커피를 홀짝이며 음악을 듣는 여자아이. 차 안에서는 조용히 해야 하는데 제법 큰 소리로 전화를 받는 아주머니, 샌드위치를 꺼내 놓고 먹으려는 커플. 아침나절의 기차에는 먼 길 갈 채비를 마친 각양각색의 사람들로 가득하다.
자리에 앉으니 누군가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굵은 빗방울이 동그라미를 만들어 창틀에 부딪쳐 흩어진다. 기차는 속력을 내며 비를 헤집고 달린다. 산허리를 휘감은 기차는 어느새 터널 속으로 들어간다. 봄물 가득 담은 논은 모내기를 코앞에 두고 있다. 경운기를 타고 어디론가 향하는 농부의 모습이 여유롭다. 한가롭지 않은 농촌인데 지나는 나그네의 눈에는 그렇게 비친다. 안개 짙은 구름은 산자락에 걸려 있고 들꽃은 비에 젖은 채 가늘게 떨고 있다.
농촌의 5월은 도시보다 한층 짙푸름이 깊다. 5월은 순결한 소녀처럼 풋풋하고 싱그럽다. 새순 자라 활짝 핀 꽃잎은 소녀의 얼굴을 닮았다. 비 내리는 날이면 나무는 한 뼘 키가 자란다. 빗방울 삼키는 잎사귀 소리가 사각거린다. 어른 주먹 크기의 개구리가 논두렁으로 튀어나온다. 안개 가득한 구름이 비를 간간이 비를 뿌린다. 멀리 저수지에는 하얗게 안개가 피어난다.
비 오는 풍경을 뒤로 한 채, 기차는 열심히 제 앞가림을 하고 있다. 쉼 없이 산을 통과하고 강을 건넌다. 얼마나 많은 터널을 통과했을까? 그렇게 앞만 보고 달리던 기차는 이윽고 목적지에 들어선다. 성격 급한 승객들은 벌써 일어나서 짐을 내린다. 갈 길 바쁜 승객들이 하나둘 서둘러 내린다.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서 역사에 내렸다. 그렇게 1박 2일의 짧은 여행도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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