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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고도 가까운 경제학

역사 속의 부자들

by 전갈 2022. 4. 4.

로스차일드 가문

로스차일드 가문의 문장

로스차일드(Mayer Amschel Rothschild, 1744~1812)200년 이상이나 유럽 사회의 금융을 지배한 명문가로서 이름이 더 높다. 부자가 망해도 3년을 간다는 속담이 있다. 그러나 로스차일드 가문이 촘촘한 금융 그물망은 여전히 수 세기에 걸쳐 부자의 반열에 이름을 올렸다. 18세기 후반부터 유럽의 은행 및 금융 산업을 장악하기 시작한 로스차일드 가문은 한때 약 3,500억 달러의 재산을 가진 엄청난 부자였다. 이 가문의 재산은 만사 무사 황제 다음으로 많은 재산을 소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유대인 집단 거주 지역의 대금업자로서 출발한 로스차일드는 유태인 특유의 악착같이 근성으로 돈을 모았다. 그는 로스차일드 은행을 창설하여 유럽 각국의 금융시장을 하나하나 장악하였다. 시간이 흐르자 로스차일드가는 축적한 막강한 재력으로 유럽 각국의 정치와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실력자가 되었다.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로스차일드 가문은 미국과 남아프리카에도 진출하여 세계 산업 전반에 막강한 입김을 불어 넣었다. 이처럼 로스차일드 가문이 산업혁명 이후 경제가 급속히 발전하는 유럽 사회에서 착실하게 금융 및 산업자본가의 지위를 다질 수 있다. 이는 봉건 군주 시대에는 농업 중심의 사회라 투자할 곳이 없었지만, 산업자본의 시대에 화려하게 펼쳐진 다양한 산업구조가 많은 투자처를 제공하였기 때문이다.

 

달도 차면 기운다 했듯이 최근 로스차일드 가문의 이름을 두고 최근 후손들 간에 법정 다툼이 일어나는 등 가문의 영광이 예전만 못하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영향력이 급격히 줄어들긴 했으나 여전히 세계 금융시장에서 큰손으로 활약하고 있다. 로스차일드 생전에 다섯 명의 아들들에게 독일 프랑크푸르트, 프랑스 파리, 영국 런던, 이탈리아 나폴리, 오스트리아 빈에 나누어 준 은행들이 훌륭하게 지점을 뿌리를 내렸다. 200년에 걸쳐 그들이 뿌려놓은 황금의 씨앗들이 오랜 세월동안 은밀하게 꽃을 피우고 있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일구어 놓은 부와 명성의 불길은 아직 꺼지지 않고 활활 타오르고 있다.

 

록펠러 가문

세계 역사 속 부자 순위 3위 자리는 3,400억 달러의 재산을 소유했던 미국의 석유 재벌 존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 1839~1937)가 차지했다. 록펠러는 1877년 불과 서른여덟 살에 미국 정유산업의 90%, 원유 채굴의 3분의 1을 장악한 석유 재벌이 되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의 철학은 불법과 편법, 정치인과 언론인 매수 등을 당연시했다. 그는 사업 경쟁자를 파멸시키기 위해 산업 스파이를 예사로 고용함으로써 불공정 경쟁을 주도하였다. 또 경쟁사가 석유 파이프라인 건설을 하지 못하도록 하려고 파이프라인 통과하는 지역의 땅을 모두 사들이는 행동도 서슴치 않았다.

 

록펠러가 소유한 탄광은 매우 위험한 작 환경과 낮은 임금으로 인해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자 1940년 콜로라도 주 러들로(Ludlow) 탄광의 노동자들은 하루 8시간 노동을 포함한 노동환경 개선과 임금 인상, 노동조합 인정을 요구하는 파업을 일으켰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열악한 작업환경에 대해 최소한 인간다운 권리를 주장하는 탄광 노동자들의 파업이 일어난 것이다. 파업은 해를 넘겨서도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다급해진 회사에서는 콜로라도 민병대의 도움을 받아 강제 진압을 나서기로 했다. 1941420일 콜로라도 민병대와 구사대가 파업 현장 근처에 있던 숙소에서 어린이 11명과 여성 2명을 살해하는 <러들로 대학살>의 비극이 일어났다.

 

이 사건을 계기로 공공연하게 자행된 록펠러의 불법과 탈법, 임금 착취와 탄압, 정치인 매수와 같은 악랄한 경영방식이 만천하에 들어났다. 록펠러는 이 사건을 수습하면서 자신의 경영철학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새로운 삶을 살았다. 그는 탄광의 작업환경, 안전, 휴양, 보건시설을 개선하는 등 근로자들의 복지를 위해 노력하였다. 근본적으로 개혁하고 노동조합 결성 등을 포함하는 계획을 승인했다. 개과천선은 록펠러에게 어울리는 말이 될 정도로 활발한 기부활동을 전개했다. 그가 죽은 후 미국의 언론은 그를 위대한 은인이라고 칭찬할 정도로 록펠러의 평판은 완전히 달라졌다. 사람의 성격이나 생각은 쉽사리 변화하지 않는다는 세상의 이치를 록펠러가 뒤짚은 셈이다.

 

철강왕 앤드루

역사상 4위의 부자 자리에 오른 사람은 미국의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Andrew Carnegie, 1835~1919)로서 한창때는 3,100억 달러의 재산을 보유했다. 카네기는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났으나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그는 방적 공장 노동자, 전보 배달원, 전신기사 등 여러 직업을 거쳐 모든 돈으로 철강 산업에 뛰어들었다.

 

카네기가 재산을 모으는 방식도 록펠러와 비슷하게 독점과 노동 탄압이었다. 그는 석탄의 채굴, 운송, 석탄 생산까지 전 과정을 독점하여 석탄 산업의 독점적 지위를 확보했다. 노동자들의 임금을 착취하고 노동운동을 탄압하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를 축적하였다. 열악한 근로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노동자들과 회사 측의 갈등이 야기되었고, 급기야 18926월 농성 중인 근로자 10명이 사망하는 <홈스테드 학살 사건>이 일어났다.

 

카네기도 말년에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고 부를 사회에 환원하였다. 1902년 당시로는 천문학적 액수인 25백만 달러를 기부하여 공공도서관 건립을 지원하는 워싱턴 카네기협회를 설립했다. 미국 전역에 25,000개의 도서관을 지었고, 카네기공과대학, 카네기교육진흥재단 등 교육·문화 분야에 투자함으로써 인재 육성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카네기가 교육 및 대학 설립에 기부한 액수가 3억 달러가 넘었고, 카네기는 말녀에 자신의 재산을 아낌없이 기부하였다. 카네기는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쓴다는 우리 속담처럼 악랄한 방법으로 돈을 벌었으나 가치 있게 돈을 사용하였다.

 

니콜라이 2세

역사상 5위의 부자에 오른 차르 니콜라이 2(1868~1918)는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왕이었다. 지구상에서 넓은 대륙인 그의 제국은 1918년 볼셰비키 혁명으로 무너졌다. 당시 3,000억 달러가 넘는 재산은 공산 혁명정부에 의해 몰수당하고 황제의 가족은 평민의 신분으로 감시 속에 살게 되었다. 황제의 지지자들이 그를 구축하려는 소식을 듣자 혁명군은 서둘러 니콜라이 황제와 그 가족들을 처형하고 시체를 불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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