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대와 현실
사람과의 관계는 예상을 벗어난 일이 잦다. 내가 이렇게 해주면 상대는 이렇게 해줄 것이라고 속으로 기대한다. 그런 기대와 현실 사이에 차이가 발생하면 우리는 실망한다. 심하면 배신감마저 든다. 평소 잘해준 사람이 의외의 반응을 보이면 화가 난다. 그래서 네가 어찌 이럴 수 있느냐고 따지기라도 하면, 상대가 잘못했다는 말 대신에 오히려 버럭 화를 내며 덤빈다. 이때는 뒤통수를 세게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든다.
잘해 주던 사람이 이런 반응을 보이면, 어안이 벙벙하고 순간적으로 멘붕 상태가 된다. 자연히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이고, 화를 낸다. 서로서로 비난하고 감정의 골이 깊어진다. 상대를 비난하고, 비판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우리가 사람을 비난하는 이유는 문제가 발생한 원인이 상대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상대방은 자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뭘 잘못했나? 속은 네가 문제다!!”라고 상대가 얼굴을 꼿꼿이 쳐들고 말한다. 그러면서 비웃는 얼굴로 쳐다본다. 상대는 지금까지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모습을 보인다.
상대가 이렇게 뻔뻔하게 말하면 목덜미를 잡고 넘어갈 일이다. 이럴 수가? 내가 평소 얼마나 잘해주었는데 이렇게 말하다니? 화가 머리까지 나고, 속에서 용광로보다 더 뜨거운 불길이 치솟는다. 정말 할 말 못 할 말 가리지 않고 다 하고 싶다. 욕이란 욕을 다 퍼붓고 나면 속이 시원할 것 같다. 손으로 뺨이라도 세게 갈겼으면 소원이 없겠다.
이렇게 화를 폭발하고 나면 정말 속이 시원해질까? 안타깝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다. 상대를 비난하면 순간적으로 내 화가 풀릴지는 모르지만, 사태 해결에는 아무 도움이 안 된다. 상대가 진심으로 잘못을 반성한다면 속이 풀릴 것이다. 그런데 상대는 자기가 뭘 잘못했느냐는 식으로 뻔뻔한 얼굴을 치켜들면 할 말이 없어진다.
상대는 용서를 구할 마음도 없고, 추호도 미안한 마음이 없다. 미치고 팔짝 뛸 일이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욕을 해봐도, 비난을 해봐도 변하는 것은 하나 없다. 오히려 내 속만 더 상하고, 내 속만 더 부글부글 끓을 뿐이다. 상대가 받아들이지 않는 비난은 고스란히 내 상처로 남는다.
속담에는 ‘때린 사람은 발 뻗고 잘 자지만, 맞은 사람은 속이 상해 잠 못 이룬다,’고 말한다. 그럴까? 때리고 불안함과 미안함에 잠 못 이룰 정도의 인물이라면 그나마 나은 편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세상 이치는 그러하지 않다. 때린 사람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희희낙락하며 잠만 잘 잔다. 외려 맞은 사람은 분하고 속이 상해 밤새 잠을 못 이룬다.
그러니 누군가에 실망하고 상처받으면 나만 손해다. 하면 내 속이 더 상한다. 내 마음만 푹푹 썩고 상처는 오롯이 내 것이 된다. 상대를 생각할 때마다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아드레날린이 증폭하고 스트레스 물질인 코르티솔이 내 혈관 속을 파고든다. 머릿속 스트레스 축이 가동돼 온몸을 힘들게 한다. 몸과 마음이 스트레스로 너덜너덜해진다.
고통은 오롯이 내 몫이다?
왜 나만 이런 고통을 받을까? 하늘이 무심하고 세상이 원망스럽다. 하지만 세상을 탓할수록 나만 손해다. 상대는 번들번들한 얼굴을 쳐들고 뻔뻔하게 사는데, 왜 당한 사람의 고통과 아픔으로 초췌한 얼굴로 살아가야 할까? 법적으로 상대를 완전히 제압하거나 힘으로 혼낼 수 없다면 깨끗이 잊어버려야 한다. 물질적으로 손해를 본 건 어쩔 수 없다고 해도, 마음이라도 상처받지 말아야 할 것이다.
사람을 대할 때 실망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내가 어떤 호의를 베풀어도 상대는 그걸 당연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상대도 내가 그렇게 해주는 것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기 기준으로 생각하고 판단한다. 내가 이렇게 해주니 상대는 이렇게 해줄 것이라는 기대치가 있다. 만일 내가 기대한 것과 상대가 보여주는 태도에 차이가 날 때, 우리는 실망하고 화를 낸다.
나도 나를 모르는 판에 다른 사람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어떤 문제든 원인이 전적으로 한 사람에게 있는 경우는 잘 없다. 경우에 어찌 되었든 배신의 기회를 준 것도 내 잘못이다. 너무 믿었다, 그럴지 몰랐다는 말은 내게는 아무 잘못도 없다는 핑계일 수 있다. 상대에 바라는 기대를 줄이고, 배신의 싹이 트기 전에 짚을 것은 분명히 짚어야 한다.
험한 세상 살아가면서 마음 맞는 사람이 그리 흔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 기대치를 낮추고 사람을 만나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그렇지만 처음에는 쌀쌀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아무 대책 없이 좋은 사람으로 있다가 나중에 뒤통수를 맞는 것보다 낫다. 배신과 실망이 싹틀 여지를 없애야 서로 존중하며 오랜 사귈 수 있다. 기대하는 것이 작으면 실망할 일도 작아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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