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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의 미학

철마산 등산기

by 전갈 2022. 3. 29.

2021년 10월 17일(일)

 

1m 앞에 두고

엄청난 부를 안겨줄 금맥을 불과 1미터 앞두고 채굴을 포기한 데이비드라는 청년의 안타까운 이야기가 있다. 미국 서부 개척시대는 유럽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원주민인 인디언을 몰아내고 세력을 확장하던 광폭한 시대다. 이주민들은 미국 동부에 닻을 내린 후, 그중 일부는 대륙을 횡단하여 서부로 건너갔다. 캘리포니아 일대의 여러 곳에서 도시를 건설하며 부를 일구기 위해 노력했다. 그 와중에서 일어난 골드러시는 동부의 이주민들이 역마차에 짐을 주렁주렁 싣고 가족과 아이들을 이끌고 서부로 달려가게 하는 마법의 주문이다.

 

1848124일 캘리포니아의 세크라멘토 강 근처에서 사는 존 서터(Johann Sutter)가 목재 가공 공장을 건설하다 우연히 커다란 금덩이를 발견했다. 그의 동료이자 목수인 제임스 마셜(JamesW.Marshall)과 서터는 이 근처에 금이 많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커다란 횡재를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금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비밀에 부치기로 했다. 그러나 발 없는 말이 오히려 하룻밤 사이에 천 리를 간다고 했듯이, 라디오나 텔레비전이 없던 시절에도 서부에서 금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어느새 동부까지 알려졌다.

 

그러자 동부에 살던 가난한 이민자들은 일확천금을 꿈꾸며 너나 할 것 없이 잰걸음으로 서부로 달려갔다. 1849년 한 해에 약 80,000명의 사람이 캘리포니아의 금광 지대에 몰려들었고, 1853년에는 그 수가 250,000명까지 늘어났다. 미국 서부 개척시대에 이만한 사람이 몰려갔다는 것은 골드러시의 광풍이 휘몰아쳤다는 말이다. 돈 벌 수단이 마땅찮던 시절에 한 번에 부를 잡을 수 있기에 금광 캐는 일 만한 것도 없었다.

 

R.U. 다비(Darby)의 삼촌도 벼락부자를 꿈꾸며 콜로라도의 금광지대로 향했다. 곡괭이와 삽을 들고 금광을 캐기 시작했다. 그는 몇 개월에 걸친 고된 작업 끝에 금맥을 찾았다. 그는 조용히 고향인 메릴랜드의 윌리엄스버그로 돌아와서 몇몇 친척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엄청난 부를 거머쥘 수 있다는 소식에 친척들은 최신 채굴기를 사도록 돈을 모아 주었다. 모두 부자가 된다는 기대에 부풀었으며 서부로부터의 성공 소식을 설레며 기다렸다.

 

새로 장만한 채굴 장비를 가지고 본격적으로 채굴을 시작하자 연이어 금이 발견되었다. 이제 비와 그의 삼촌은 곧 부자가 된다는 희망에 부풀었다. 그들은 잠자는 시간을 빼곤 밤낮없이 채굴에 매달렸다. 그러나 어찌 된 영문이지 갑자기 금맥이 사라지고 금이라곤 눈 씻고 찾아보기 힘들었다. 두 사람은 필사적으로 땅을 팠지만, 손에 잡히는 건 먼지 날리는 흙덩이뿐이었다. 낙담하기가 이만저만 하지 않은 그들은 결국 금 캐는 일을 단념했다. 돈도 떨어지고 의욕마저 떨어진 그들은 부자가 되는 꿈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두 사람은 고가의 채굴 장비를 단돈 몇백 달러의 헐값에 고물상에 팔아버렸다. 그리고 초라한 파산자의 몰골을 하고 고향인 윌리엄스버그로 돌아왔다.

 

그런데 놀라운 반전이 일어났다. 다비와 그의 삼촌으로부터 채굴 장비를 사들인 고물상은 광산 기사를 불러 금광을 살펴보게 했다. 그러자 다비와 그의 삼촌이 금액을 잘못 집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들이 파다 끝내 포기한 자리 바로 1미터 아래에 노란색 금을 가득 품은 금맥이 숨죽이고 있었다.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딴 사람이 번다는 말이 들어맞는 순간이다. 다비와 그의 삼촌이 생고생하며 개척한 광산, 바로 그곳에서 1미터 아래에 일확천금이 있을 줄 알았다면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행운은 마지막 순간에 다시 한번 상황을 면밀히 검토하고 도전했던 고물상의 몫으로 돌아갔다.

 

“1미터 더 파면 금맥을 발견할 수 있는데, 조금만 더 노력하지 왜 포기했나?”

 

이야기의 결말을 알고 나면 누구나 그렇게 말할 수 있다.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밀어붙이지 않았느냐고 다비와 그의 삼촌을 어리석음을 탓할 것이다. 그런 말이야 일이 끝나고 난 후에서야 누가 할 수 없겠는가? 사후에 이러쿵저러쿵하는 말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일이 잘 풀길 기미가 보이지 않고 돈은 바닥난 지 오래면 포기하지 않고 버틸 재간이 있겠는가. 진정한 용기는 아무도 도전하지 않을 때 도전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안 된다고 말할 때도 확신을 갖고 밀어붙여야 크게 성공한다. 그렇다고 애초부터 가능성이 없는 일을 혼자 고집하는 건 어리석은 행동이다. 성공할 가능성을 충분히 검토하고 그것이 가능하다는 확신을 가진 일은 중간에서 포기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렇게 해도 성공한다고 100퍼센트 확신할 수 없는 것이 삶이다.

 

300m 앞에 두고

다시 가을 산행을 시작했다. 작년부터 근교의 산을 함께 오르는 즐거움을 갖는다. 가을의 예봉산, 봄날의 천마산 그리고 용인 근처의 소소한 몇 개의 산을 오르며 계절을 변화를 느낀다. 전문적으로 산을 타는 사람이야 장비를 갖추고 시간을 많이 투자해서 겨울산의 설경을 맛보고 여름 산의 울창한 녹음 속에 묻히기도 한다. 아마추어 등산객들로서야 사시사철 산을 오르거나 먼 거리에 있는 큰 산을 오르는 일이 버겁다. 3~5월의 봄 한 철과 9~11월의 가을이 산을 오르기에 제격이다. 그렇다고 매주 산을 갈 수 없는 노릇이고 보면, 1년에 탐방하는 산의 개수도 한정적이다. 그렇지만 반복된 일상의 반복을 탈피하고 자연 속에서 새로운 기운을 받기에는 그만하면 도시인에게는 작지만 소담스런 즐거움이다.

 

어제는 남양주시 철마산을 올랐다. 평탄한 길 2.4km에 산행 2km이라 하니 그리 힘들게 뭐 있겠냐며 호기롭게 출발했다. 아파트 단지 옆길로 난 산 초입은 잘 단정되어 있다. 심지어 벌레 퇴치를 위한 에어가 있는 걸 보니 관리소에서 나름 신경을 써서 관리하나 보다. ‘떡 본 김에 제사모시는 일이 당연하듯, 우리는 벌레 퇴치제를 뿌리고 씩씩하게 첫 발을 뗐다.

 

철마산 입구

 

오호 산으로 오르는 초입은 널따란 평지다. 등산길에는 몇 해나 떨어져 쌓인 낙엽들이 수북하다. 발밑이 푹신한 게 낙엽의 양탄자를 밟는 기분이다. 몇 걸음 옮기지 않아 만나는 해참공원에는 어린이 놀이 기구가 놓여있다.

 

이 동네 어린이들은 산속에서 노는군

 

농담에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한발씩 앞으로 나아간다. 본격적으로 산을 오르자 아파트와 제법 떨어진 산속에 큰 건물이 하나 덩그러니 서 있다. 웬 사무실이 이런 산속에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여기 근무하는 사람들은 매일 피튼치드로 목욕하니 참 행복하겠다는 생각도 함께 든다. 집에 와서 확인해보니 일반 사무실이 아니고 요양병원이라 이해가 된다. 그럼 그렇지 일반 건물이 깊은 산속에 있다면 의아한 일이다.

 

철마산 요양병원

 

한적한 시골의 산책길을 2km를 넘게 걸었는데 사람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아주 가끔 한두 사람 하산 사람을 만나는 것도 드물다. 처음 검단산을 목표로 했다가 사람이 너무 많을 것 같아서 철마산으로 방향을 바꿨는데, 이번에는 사람이 없어도 너무 없다. 어쨌든 조용한 산행을 원했던 우리로서야 사람들로 번잡스럽지 않아 좋다. 쉬엄쉬엄 한참을 오르다 보니 어느새 철마산 정상까지 1.7km를 알리는 이정표를 만났다. 지금까지는 오르막이라 해도 완만해서 크게 숨 가쁠 일 없었지만,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산행이 시작되리라는 짐작에 마음을 다잡는다.

 

제법 가파른 산길이 앞을 가로막는다. 줄을 타고 올라가야 할 정도로 미끄러운 경사길을 만난다. 낑낑대며 산길을 한발 한발 오르니 제법 쌀쌀하던 아침의 한기가 사라진다. 두꺼운 외피를 벗고 가벼운 복장으로 오르막을 오른다. 중간중간 쉼터에는 의자가 놓였다. 중간에서 오래 쉬다 보면 오히려 체력이 떨어지고 등산 의지가 꺾일 위험이 있다. 그래서 쉬지 않고 발길을 재촉해서 가파른 오르막을 오른다. 이제 본격적으로 숨이 차고 등에서는 열이 나기 시작한다.

 

그래 산은 이래야 제맛이야!! 밋밋한 평지가 무슨 산이야!!”

 

호기롭게 큰소리를 쳤다. 아뿔싸 그게 아니다. 허위허위 힘들게 산길을 올라가니 봉우리를 만났다. ‘목표봉이라 누군가 간판을 세웠다. 친절하게도 444m라는 높이도 새겨놓았다. 서울 근교 산을 다니면서도 중간 봉우리가 있는 산은 처음이다. 대개 산은 꼭대기 외에 다른 높은 봉우리가 없다. 그런 점에서 보면, 철마산은 산 초입이 2km가 넘고 중간에 작은 산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 색다르다.

 

목표봉에서 건너편을 바라보니 높은 산이 보인다. 저게 철마산 정상이라는 짐작이 든다. 저 산을 오르려면 목표봉을 내려가서 중간에서 다시 올라야 한다. 이건 만만치 않은 산행이라는 예감이 뇌리를 스친다. 한마디로 제대로 된 임자를 만난 셈이다. 지금까지 다닌 산이면 목표봉에서 조금만 더 오르면 정상을 만난다. 지금처럼 맞은 편에 높다란 산 정상이 있을 줄은 짐작하지 못했다. 지리산이나 설악산 같은 큰 산과는 비교할 바가 못 되지만, 인근에서 찾기 힘든 제법 오르락내리락을 반복하는 곳이 철마산이다.

 

몇 개의 작은 봉우리를 넘나드니 어느새 철마산을 700m 지점까지 왔다. 간단히 먹은 이른 아침이 벌써 소화되어 급작스레 허기가 몰려온다. 높은 산에서 허기를 만나면 급격하게 당이 떨어져 체력 소모가 빨라진다. 마침 벤치가 놓인 꼭대기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산을 오를 때 배가 고프다고 너무 많이 먹으면 오히려 체력 안배에 방해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준비해온 작은 떡 4개로 요기 삼아 허기를 달랬다.

 

700m면 식은 죽 먹기다. 실제로 정상에 눈앞에 보인다. 그런데 철마산 꼭대기를 오르려면 다시 하산해야 한다. 가파른 절벽을 조심스레 내려간다. 돌아올 때 다시 이 길을 오를 것을 생각하니 아찔하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내려가는 방법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 한참을 내려가니 다시 오르는 길이다. 이제 정상을 오르는 길이라 가파르기가 제법이다. 급경사로 인한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길옆에 말뚝을 박고 굵은 밧줄을 매달았다. 밧줄에 당기며 산을 오르니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올려보니 거의 수직에 가까운 산길이 끝이 보이지 않는다. 이 고비만 넘기면 평지가 나오지 않을까? 기대는 산산이 부서졌다. 이제 평평한 길을 찾아볼 수 없고 오직 오르막뿐이다.

 

이제 300m 남았다는 팻말을 보는 순간 안도의 한숨을 쉰다. 그래 300m 정도면, 다 왔는데 가파르다고 해도 거기서 거기까지다. 이제 조그만 애 쓰면 철마산 정상에 선 내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 상상으로 마지막 힘을 내 산을 오른다. 하긴 경기도 인근 산의 정상 아래 300m서부터는 가파르다 해도 그리 길지 않고 이내 끝난다. 철마산도 당연히 그럴 것이라 짐작했다. 그러나 우리 생각이 틀렸음을 끔찍하게 일러준다. 철마산 정상 아래 300m는 마치 3km가 되는 것처럼 길게 느껴진다. 오르고 또 올라도 하마나 보일까 하는 정상이 보이지 않는다. 마지막 정상으로 오르는 마지막 순간이 극강의 고통으로 다가온다.

 

철마산 정상

 

드디어 철마산 꼭대기에 올랐다. 정상을 올랐다는 뿌듯함과 고통을 이겨냈다는 자부심이 한껏 기쁘게 만든다. 저 멀리 보이는 도시의 풍경이 아득하게 멀다. 첩첩산중이라는 말에 어울리는 깊은 산의 정상이다. 힘들게 오른 산 정상에서 맛보는 청량함은 도시의 소음에 찌든 마음을 깨끗하게 정화한다. 험한 산길을 오를 때의 후회와 고통을 한 방에 날려버리는 순간이다. 고통 없이 얻을 수 있는 기쁨이 없다는 말을 중언부언해도 시답지 않은 것은 산이라 그럴 것이다.

 

산 중턱에서 포기하고픈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 아깝다. 1m 앞두고 금광 파기를 포기한 사람들이야 더 버틸 재간이 없었기 때문이지만, 산을 오르는 일을 그런 힘든 것과 비교할 바가 못 된다. 그러나 사람은 일상 속에서 크고 작은 힘든 순간을 만난다. 산을 오르든, 과업을 수행하든, 장사를 하든, 어느 경우에든 그만두고 싶은 생각을 떠올릴 때가 있다. 그때마다 우리는 견디고 인내하며 최선을 다한다. 정상을 300m 앞에 둔 사람의 마음으로 우리는 살아간다. 그건 견디는 힘이 있고, 또 목표가 분명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진정한 용기는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고, 모든 의욕이 좌절할 때 다시 한번 용기를 내는 일이다. 1m를 더 파보는 용기를 과연 몇 사람이 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