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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의 미학

장항역과 서천 국립생태공원

by 전갈 2022. 4. 1.

2020년 5월 16일(

 

아침 520분 집을 나선다. 이른 시간이라 인적이 드물다. 친구들과 서산 일대 여행을 하기로 했다. 대구의 친구들은 금요일 출발해서 변산반도에 있는 리조트에서 1박을 했다. 금요일 수업이 있는 관계로 나는 하루 늦게 출발한다영등포역으로 가서 630분에 출발하는 장항선 무궁화 열차를 탄다. 안양, 천안, 아산, 예산, 삽교, 대천, 서천을 거쳐 익산까지 가는 길이 장항선이다. 오래전 지도책에서나 보았던 지명들을 만난다. 예산과 삽교는 노랫말로 몇 번 들은 적 있지만, 열차로 지나치는 것은 처음이다. 아득한 추억과 기억이 버무린 추억 여행이다.

 

630분 영등포를 출발한 기차는 약속 장소인 장항역을 향해 길 떠난다. 속도를 붙인 기차는 이윽고 봄비에 젖은 건물 사이를 헤치고 나간다. 안개는 회색 도시를 아늑하게 감싼다. 마치 아름다운 여인의 손길 닮은 안개가 살며시 도시를 어루만진다. 이런 날은 늘 설렘, 고독, 아쉬움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 솟는다. 젊은 날 보내버린 어느 여인의 청순한 모습이 함께 떠오른다. 안개는 흘려보낸 안타까움을 생각나게 하고 몽환의 세계로 이끈다.

 

어느새 기차는 초록이 아찔한 들판으로 내달린다. 봄비는 못물을 가득 채워 바람결에 일렁이게 한다. 내리는 빗물로 말끔하게 세수한 나뭇잎이 눈부시다. 이제 잎들은 풍성한 꽃을 피울 것이다. 가을 결실 수확하기 위한 첫 단추를 잘 꿰맨 봄은 비를 뿌리며 제 소임을 다한다. 이제 며칠 지나면 곡식과 과일을 농익게 하고 향기를 머금게 하는 책임을 여름에 넘길 것이다. 그렇게 봄은 계절의 순환에 몸을 맡기고 조용히 침묵의 시간을 보낸다.

 

차창으로 스쳐 지나는 5월은 언제나 싱그럽다. 사춘기를 지나 성숙한 여인으로 태어나는 아름다운 여인의 자태를 뽐낸다. 때마침 내린 비는 대지를 그네들의 탱탱하고 맑은 피부를 닮아 생기 넘치게 만든다. 논 가득한 물은 모심기 손꼽을 농부의 흐뭇한 미소를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지나는 들판과 도시 어딘들 정겹지 않을 수 없다. 그 속의 삶은 어떨지 몰라도 지나는 나그네의 눈에는 낭만이 뚝뚝 떨어진다.

 

장항역

 

영등포역을 출발한 열차는 3시간 10분이 지난 940분에 장항역에 도착했다. 장항역은 한적한 시골에 있다. 야트막한 건물들과 언덕이 어우러진 곳이다. 그리 바쁘지 않은 느릿한 삶이 여유로워 보인다. 장항역(Janghang station, 長項驛)은 충청남도 서천군 마서면에 있는 장항선의 철도역이다. 원래는 장항읍에 자리했으나 장항선 직선화 사업에 따라 역의 위치가 지금의 마서면으로 이사했다. 그렇지만 역명은 그대로 장항역(長項驛)으로 쓰고 있다. 장항역 역사는 시골 역사답게 작고 앙증맞다. 시간이 멈춘 듯한 풍경이 정감이 간다.

 

장항역 앞에서 친구들과 만났다. 낯선 곳, 낯선 풍경에서 낯익은 얼굴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역사 앞에는 사람 그림자 찾기 힘들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풍경화 속의 장면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풍경 자체가 그림이 되어 눈앞에 있다. 때마침 쏟아지는 5월의 아침 햇살이 마치 꿈속을 걷는 듯한 기분을 준다.

 

서천국립생태공원

 

우리는 장항역에서 5분 거리에 있는 국립생태공원을 구경했다. 서천 국립생태공원은 온대관, 사막관, 열대관, 지중해관, 극지관, 4D영상관, 상설전시관의 7개 구역으로 이뤄져 있다. 이곳에서는 남극과 북극의 빙하지대에서 열대우림까지 전 세계의 기후에 따른 동물과 식물을 관찰할 수 있다. 열대관의 경우는 1년 내내 비가 내리고, 열대우림 중 아시아, 아프리카 등의 열대우림을 재현했다. 사막관은 한겨울에도 10도 이상 온도가 유지되고 사막지대의 식물이 자란다. 그 외에도 지중해관, 온대관, 극지관에서는 각 지역에 맞는 기후대와 식물과 동물의 서식 상태를 보여준다.

이처럼 서천 국립생태공원는 기후 지대별 테마를 잘 배치하고 내용도 알차다. 깨끗하고 볼거리들이 풍성하다. 이만하면 한국도 공원을 만드는 실력이 상당하다는 걸 인정하게 만든다. 치열한 경쟁이 만든 우리들의 실력이다. 경쟁이 개인의 행복을 그만큼 높게 만들 수는 없지만, 결과만큼은 아름답다. 대한민국이 여러 분야에서 세계 표준이 되는 이유도 치열한 경쟁을 이겨낸 덕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