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31일(금)
노르웨이의 숲
봄밤 가만히 귀 기울이면 앞서거니 뒤서거니 꽃 피는 소리 들린다. 밤새 사각거리며 꽃 피느라 봄밤이 분주하다. 벚꽃, 진달래, 산수유, 목련이 앞 다투며 꽃망울 터트린다. 그런 봄밤 책장 한구석에 가만히 서 있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오래전 이제는 기억마저 희미한 시절에 읽었던 책을 다시 꺼내 읽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1987년 쓴 『상실의 시대』다. 1990년대 이 책을 읽지 않고 청춘의 시대를 지난 사람은 거의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많은 사람이 읽었다. 한참이나 세월이 지난 후 다시 읽어도 청춘의 애틋함을 느낀다.
이 책의 원래 제목은 비틀즈의 노래 ‘Norwegian Wood(This Bird Has Flown)’를 딴 『노르웨이의 숲』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988년 원래 제목인 『노르웨이의 숲』으로 출간했으나 별 주목을 받지 못했다.
1989년 문학사상사에서 제목을 『상실의 시대』로 바꿔 출간해서 국내에서도 크게 유명해진 작품이다. ‘상실의 시대’하는 제목이 방황하는 청춘의 심리를 잘 표현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나중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요구와 원제목을 좋아하는 국내 독자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노르웨이의 숲』으로 출간되고 있다.
“그때 서른일곱 살이던 나는 보잉 747기의 한 좌석에 앉아 있었다. 거대한 비행기는 두터운 비구름을 뚫고 내려와, 함부르크 공항에 막 착륙하려 하고 있었다.”
이야기는 주인공인 ‘나’(와타나베)가 함부르크 공항에서 18년 전의 추억을 회상하면서 시작된다. 와타나베가 겪은 10대부터 30대까지의 황홀하고 애틋한 사랑을 그리고 있다.
와타나베는 '기즈키'와 '나오코' ,‘나오코'와 '미도리'. ’나오코‘와 ’레이코‘의 중심에 늘 서 있다. 그녀들과의 삼각관계에서 겪는 사랑, 질투, 미움, 고독을 잘 묘사하였다. 하루키는 청춘의 성장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경험하는 사랑과 이별의 감정을 시적이면서 서정적인 문장으로 풀어낸다.
사랑과 방항
와타나베는 내성적이며 염세적인 성격을 지녔다. 친구가 없는 그에게 기즈키와 기즈키의 오랜 연인인 나오코와의 만남은 학창 시설 유일한 교류였다. 기츠키가 죽자 나오코는 마음의 병을 앓다가 요양원에 입원한다.
어느날 그녀로부터 온 편지를 받은 그는 나오코가 교토의 한 요양원에 입원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그곳에는 한 번 나가면 다시 들어갈 수 없다는 규칙이 있다. 더 이상 나오코를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와타나베는 방황한다.
와타나베는 대학에서 같은 수업을 듣는 미도리를 알게 된다. 와타나베는 상실감으로 우울에 빠진 나오코와는 상반된 활달한 미도리에게 마음을 준다. 미도리에게는 남자친구가 있고 와타나베게는 나오코가 있지만 둘은 특별한 감정을 싹틔운다. 와타나베는 나오코와 미도리 사이에서 방황하게 된다.
어느 날 와타나베는 나오코로부터 만나고 싶다는 편지를 받고 교토로 간다. 그곳에서 음악치료를 하면서 자신도 요양원 환자이기도 한 레이코를 만난다. 레이코는 나오코의 룸메이트로 두 사람은 요양원에서 서로 의지하며 지내는 사이다.
나오코는 요양원에서 평온한 시간을 보내며 점차 회복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런 나오코와 한동안 시간을 보낸 와타나베는 다시 도쿄로 돌아온다. 도쿄로 돌아온 와타나베와 미도리의 관계도 깊어진다.
건강을 회복할 것처럼 보이던 나오코의 병세는 깊어졌다. 와타나베의 간절한 기도와 바람도 허무하게 나오코는 자살한다. 그 아픔을 견디지 못해 그는 여행을 떠난다.
나오코가 죽는 순간을 지켜본 레이코가 그녀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와타나베를 만나러 온다. 두 사람은 나오코를 위한 조촐한 장례식을 치르고 관계를 갖는다. 그리고 그녀는 역 플랫폼의 벤치에서 작별한다. 두 사람은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오코는 하늘나라로 떠났고 레이코와는 작별했다. 두 여인은 떠나고 와타나베에게 미도리만 남았다. 오랜 방황을 끝낼 차례다. 이야기는 와타나베게 미도리에게 전화를 걸면서 끝난다.
와타나베는 미도리에게 꼭 이야기하고 싶다고, 이야기할 게 너무 많고, 이야기해야만 할 게 산처럼 쌓였다고 말한다. 온 세계에서 그녀말고 자신이 원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무엇이 됐건 모든 걸 둘이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말한다.
미도리는 한참 동안 전화 저쪽에서 말이 없었다. 마치 온 세계의 가랑비가 온 세계의 잔디밭에 내리는 것 같은 침묵만이 이어졌다. 와타나는 그 동안 줄곧 유리창에 이마를 바짝 붙이고, 눈을 감고 있었다.
"자기, 지금 어디 있는 거야?"
미도리는 조용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그러자 와타나베는 혼자 생각한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와타나베 수화기를 든 채 고개를 들고, 공중전화 부스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면서 계속 생각한다. 자신이 지금 어디 있는지를.
하루키의 지중해
하루키는 이 소설을 남부 유럽에서 썼다. 책 후기에서 밝히길 그는 1986년 12월 21일 그리스 미케네 섬의 한 빌라에서 이 소설을 쓰기 시작해서, 1987년 3월 27일 로마 교외의 아파트 호텔에서 완성했다. 그는 전화도 없고 찾아오는 손님도 없는 곳에서 오직 글 쓰는 일에만 몰두했다고 한다. 혼자만의 고독 속에서 『노르웨이의 숲』에 몰두한 것이다.
그는 소설의 전반부는 그리스에서, 중반부는 시칠리아에서, 후반부는 로마에서 썼다. 그리스의 미케네 섬과 시칠리아에서 바라본 지중해의 푸른 바다가 무척 아름다웠을 것이다. 눈부신 푸른 바다를 풍경을 보며 그는『노르웨이의 숲』을 탈고했다. 이 소설에서 느껴지는 이국적 향기는 하루키가 소설을 쓴 장소의 느낌이 묻어나서 그런 것이 아닐까?
빛나는 청춘의 시절이 오히려 더 어둡고 암울하게 느껴졌던 건 왜일까? 빈약한 오늘은 늘 허전하고, 무엇이 될지 알 수 없는 내일은 늘 공허했다. 막연한 희망과 차가운 현실 사이에서 그저 아파할 수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누구나 그런 '상실의 시대'를 지나온다. 되돌아 보면 그 시절이 얼마나 아름다웠든지 회한이 밀려온다. 돌아갈 수 없기에 더 애틋하고 절절한 건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소설은 현재의 청춘에게, 또 돌아갈 수 없는 모든 세대에게 바치는 헌사일 것이다.
지금은 나와 관계가 먼 세대의 이야기지만 그 시절의 추억을 소환해 본다. 오래전 흔적도 없이 지나버린 청춘의 기억이 아스라이 봄밤에 젖는다. 꽃 진다고 서러울 것 없다. 꽃잎 떨어진 자리 눈물 고여도 다시 꽃은 핀다. 그렇듯 이제 새로운 청춘들도 사랑과 이별의 애틋함에 잠 못 이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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