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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의 미학

리본의 고마움

by 전갈 2022. 4. 18.

불기고개에서 주금산을 오르는 산길에는 사람 만나기가 힘들다. 산 정상 가까이 돼서야 다른 등산로로 올라오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서울 근교의 사람들로 분비는 산과 비교하면 조용히 산을 오르기에는 더 할 나위 없이 좋다. 딸아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 정상에 올랐다. 경치 좋은 곳에서는 작품 사진도 몇 점 건졌다. 사람이 없다보니 경치 좋은 곳을 오래 독차지 할 수 있어 가능한 일이다.

 

문제는 하산길이다. 내려오는 길에는 여러 갈래로 나눠지는 곳이 몇 군데 있다. 오를 때야 정상으로 가는 길로 모이기 때문에 길을 따라 걷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오면서 만나는 갈림길은 혼란스럽게 만든다. 앞선 등산객이 친절하게 나뭇가지에 매단 리본이 무척 반갑다. 그것을 따라가면 길이 나오니 아무런 걱정이 없다.

 

이윽고 산을 한참이나 내려와 멀리 마을이 보인다. 이제 곧장 가면 되겠구나 하는데 갈림길을 만났다. 평지에서 길이 나눠지다 보니 주변에 리본을 매단 나무도 없다. 지나가는 사람도 없고 해서 딸아이와 의논해서 오른쪽 길을 택했다. 분명 사람이 다니는 길이고 왼쪽보다 더 넓어 보였다. 씩씩하게 내려오면서 산이 조용해서 좋다는 말을 나눴다.

 

아뿔싸! 내려갈수록 점점 숲이 깊어진다. 조금 전까지 보이던 마을도 시야에서 사라졌다. 오직 깊은 침묵과 짙은 숲 그림자만 가득한다. 길을 잘못 들었다. 사방을 둘러봐도 사람 그림자라곤 보이지 않는다. 산에서 이렇게 길을 잃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주금산이야 그리 높지 않아 금방 길을 찾겠지만 깊은 산이라면 크게 당황했을 것이다.

 

딸아이가 스마트 폰에서 지도 앱 검색한다.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이 확실하다. 한참이나 내려온 길을 다시 거꾸로 올라 갈림길을 찾았다. 앱에서 알려준 방향으로 왼쪽 길을 택해서 하산을 재촉했다. 다행히 빨간 리본이 달린 나뭇가지를 만났다. 리본을 매단 산악인이 참 고맙다는 마음이 든다. 그들의 수고가 안전하게 산을 즐길 수 있게 해준다.

 

높은 산을 오르거나 내려올 때 간혹 사람들은 방향 감각을 잃고 제자리를 맴도는 경우가 있다. 등산객은 목표한 곳으로 전진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동일한 장소에서 큰 원을 그리며 돌면서 탈진하는 링반데롱(Ringwanderung)을 만나기도 한다. 그러나 주금산을 그리 높지 않기에 링반데롱에 빠지지 않지만 나름 색다른 재미를 우리에게 선물했다. 산은 높고 낮음을 따지지 않고 조심해서 오르고 내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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