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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의 미학

사랑이 어떻게 안 변하니?

by 전갈 2022. 5. 25.

 

2022년 5월 25일(수)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하고 상우가 묻는다.

“헤어져!!”라고 은수가 단호하게 말한다.

 

유지태와 이영애가 주연한 ‘봄날이 간다(2001)’에서 주인공 상우(유지태)와 은수(이영애)의 이별 장면이다.

어느 겨울 상우가 지방 방송국 라디오 PD 은수(이영애 분)를 만나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자연의 소리를 채집해 틀어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은수는 상우와 녹음 여행을 떠난다. 자연스레 가까워진 두 사람의 사랑이 시작됐다.

상우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은수에게 빠졌다. 상우는 이제 사랑이 왔다고 느꼈다. 운명은 참 얄궃다. 봄이 지나자 두 사람의 사랑도 서걱거린다. 한 번 이혼한 경험이 있는 은수는 다시 결혼할 생각이 없다. 그래서 상우의 뜨거운 사랑이 부담스럽다.

너무 빨리, 너무 깊이 빠진 상우의 사랑이 이른 결별을 불러왔다. 빨리 다는 화로가 빨리 식는다. 사랑이 익숙해지고 이제 막 행복을 느끼시 시작했는데 벌써 이별이라니? 변치 않을 거라 믿은 사랑이 봄날과 함께 간다니 상우는 믿을 수 없다.

사랑의 묘약은 말라버린다.

사랑하지 않을 때 우리는 사랑을 동경한다. 사랑이 다가오고 사랑에 빠지면 기쁨에 들뜬다. 하늘을 얻은 듯한 마음이 들고 하루하루가 행복하다. 시간이 지나고 자주 만나다 보면 서로에 적응한다. 불타는 감정도 무뎌지고 처음의 떨림도 사라진다. 사소한 일에도 말다툼이 잦아지고 갈등이 깊어간다.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감정이 악화하면 끝내는 이별한다.

왜 그럴까? 변하지 않는 사람이 있긴 한 걸까? 어쩌면 사랑이 어떻게 안 변하니 하고 묻는 게 정상일지도 모른다. 사람 마음이 끊임없이 변하는 이유는 우리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화학물질의 변화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화학물질의 변화가 사랑의 감정을 요동치게 했다가 잦아들게 한다.

헬렌 피셔(Helen Fisher)는 저서 『왜 우리는 사랑에 빠지는가』에서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지고 이별하는 과정을 잘 묘사했다. 그녀는 사랑이 진행되는 동안 우리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화학물질의 변화를 보여준다. 사랑이 어찌 화학물질일까? 입맛이 쓰지만, 그녀의 주장을 틀렸다 할 수 없다.

그녀는 사랑은 갈망에서 끌림으로, 끌림에서 애착의 3단계를 거친다고 말한다. 단계마다 뇌에서 분비되는 화학물질이 달라 다른 감정을 느끼게 된다. 남녀가 처음 보고 싶고 그리움이 싹틀 때는 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과 에스트로겐이 활발하게 솟는다. 서로 좋아하는 감정이 쌓이고 사랑에 빠질 때는 도파민과 세로토닌이 용솟음친다. 도파민과 세로토닌은 보고 있어도 보고 싶게 만드는 사랑의 묘약이다.

사랑의 묘약으로 타오른 사랑은 자연스레 스킨십을 유도하는 옥시토신과 바소프레신을 생성한다. 묘약이 지핀 불씨를 활활 타오르게 하는 마법의 물질이다. 세상의 연인들을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껴안게 한다. 이쯤 되면 서로가 죽고 못 사는 사이가 된다.

사랑의 유통기한이 겨우 2년?

이렇게 평생을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평생 꼭 붙어사는 닭살 돋는 연인이 될 것이다. 얄궂고 변덕 넘치는 게 사람 마음이라 변하지 않는 마음이란 없다. 마음이란 두뇌 신경세포의 연결망의 전기적 신호의 흐름이다. 도파민, 세로토닌, 옥시토신 같은 화학물질의 변화는 전기적 신호의 흐름을 변화시킨다. 전기적 신호의 크기와 강도가 변하면 마음과 생각이 변한다.

사랑의 불을 지피고 타오르게 하는 화학물질이 변하지 않으면 사랑은 한결같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는 상우의 슬픈 대사도 없다. 은수도 “헤어져!!”라는 차가운 말을 뱉을 리도 없다. 어쩌면 두 사람은 “우리 이대로 쭉 살아갈래”라고 한목소리를 냈을 것이다. 이별의 아픔으로 고통받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수많은 소설과 문학작품도 애초부터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사랑의 화학물질의 분비량과 농도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약해진다. 익숙한 것에서 무뎌져 처음 사랑에 빠질 때처럼 사랑의 샘이 솟지 않는다. 서서히 샘물은 줄어들고 끝내 말라버린다. 사랑은 떠나고 슬픈 마음만 남는다.

핼렌 피셔와 시작에서 절정에 이르기까지 사랑의 묘약이 유지되는 기간은 2년이고 길어야 3~4년이다. 불멸의 사랑, 영원한 사랑은 다 어디로 갔는가. 상대를 생각하는 뜨거운 마음은 식고 이별의 순간까지 고작 2년이라니 믿기지 않는다.

사랑이 어떻게 안 변하니?

어떤 이별이라도 아프지 않은 것은 없다. 세상의 모든 결별은 상처를 남기기 마련이다. 봄꽃 지는 나무도 가을낙엽 흩어지는 나무도 다 제 몸속에 동심원의 깊은 흉터를 남긴다.

하물며 사람에게서 사랑하는 이별은 가슴을 칼로 도려내고 멀쩡한 생살을 찢는 고통이다. 어떤 이는 아픔을 잘 참고 마음의 나이테를 하나 더 그려 내는 의연함을 보인다. 가슴에는 피눈물이 솟고 상처마다 선혈이 낭자하지만 애써 태연한 척 그렇게 용감하게 살아간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사랑을 잘 보관하면 오래간다. 너무 뜨거운 전쟁 같은 사랑은 겨우 2년 남짓 간다. 그 시간이 지나면 사랑은 식고 사랑은 변한다. 아니 사랑의 색깔과 농도도 변해야 오래간다. 친구 같은 사랑, 우정 같은 사랑이면 오래 두어도 잘 변치 않는다. 늘 뜨겁기만 바라지 않는다면 말이다.

사랑이 어떻게 안 변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