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황제다(Born in the purple)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보라색을 하늘의 색이라 생각하며 귀하게 여겼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와 플라톤(Plato) 등 고대의 철학자들은 보라색을 가장 아름다운 색이라 좋아했다. 그리스의 신을 모시는 제사장은 보라색을 옷을 입었다는 사실에서 얼마나 존경을 받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신을 모시는 일은 가장 신성한 일이기 때문에 가장 깨끗하고 숭고한 색의 옷을 입었을 것이다.
로마 시대에는 보라색이 황제의 색으로 추앙받았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시절에는 원로원조차 보라색 옷을 입을 수 없었다. 오직 절대 권력자의 한 사람을 위한 색이었다. 네로 황제는 보라색 옷을 입는 사람은 황제의 자리를 탐낸다고 생각하여 반역죄로 처형을 시켰다. 지금도 남아 있는 네로 황제의 욕조는 보라색 광택이 나는 대리석으로 여전히 화려한 자태를 자랑한다.
고대로마 시대에 보라색을 만드는 방식을 재현했다. 1만 2천 마리의 가시달팽이 소라를 구해서 만든 염료로 겨우 보라색 손수건 한 장을 염색했다. 이렇게 만든 보라색 손수건 한 장의 값이 무려 1,500만 원이나 된다. 로마 제사관 외투 한 벌 염색하는 데 달팽이가 무려 300만 마리가 필요했다고 하니 보라색을 구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상상을 초월한다. 그러니 절대 권력을 가진 황제 말고 이렇게 귀한 보라색의 옷을 입을 수 있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
보라색을 만드는 데 너무 많은 돈이 들었다. 게다가 사람들이 너도나도 보라색을 찾으니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로마의 황제조차 보라색 염료를 구하기 힘들게 됐다. 동로마 제국의 황실은 보라색을 황실 건축물과 황실 관련 도구에만 사용할 수 있도록 엄격히 사용을 규제했다. 보라색 염료를 만드는 방법을 국가가 철통같은 보안 속에서 직접 관리했기 때문에 제국이 멸망하면서 비법도 함께 사라졌다. 그 이후에는 황제조자 보라색을 쉽게 손에 넣기 힘들어졌다.
동로마 제국의 황제의 자식 중에서 보라색 방에서 태어난 아이가 왕위 계승권을 가졌다. 콘스탄티노플의 궁전에는 바닥에서부터 벽면, 커튼까지 온통 보라색으로 꾸며진 방이 있었다. 이방에서 태어난 아이들 가운데 하나가 왕이 되었다. ‘born in the purple’이 ‘왕이나 귀족의 신분으로 태어난’이란 뜻을 가진 것이 이 때문이다.
동성애의 상징
보라색은 무지개색 가운데서 가장 신비로운 색이다. 화려하지만 우울하고 도도하지만 외로움이 느껴진다. 보라색은 열정의 빨강과 냉정의 파랑이 만난 색이다. 그래서 남성적인 강함과 여성적인 부드러움이 함께한다. 도회적 우아함과 세련미를 갖춘 까닭은 보라가 가진 중성적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또 보라색은 신비로움, 고귀함, 화려함, 치유의 긍정적인 이미지와 고독, 우울, 상처와 같은 부정적 이미지를 함께 가지고 있다.
보라색은 고고함, 세련된 이미지를 주기에 예로부터 귀부인과 귀족들의 옷감으로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보라색이 가진 난해한 이미지와 강한 개성으로 다른 색깔과의 조화가 무척 어렵다. 자칫하면 천박하거나 세련되지 못한 느낌을 줄 수 있는 것이 보라색과의 조합이다. 오죽하면 보라색을 입었을 때 어울리는 사람이 진짜 미인이라는 말이 나왔을까. 보라색은 개성이 강한 색깔이라 다른 색상과의 조화가 무척이나 까다롭다.
보라색을 좋아하는 사람은 예술적 감수성이 풍부하고 직관력이 뛰어나다고 한다. 보라색은 아름다움과 예술에 관련된 영감을 주고 창의력을 자극한다. 따라서 예술작품, 창의적 상품을 생산할 때 보라색을 많이 활용한다. 특히 고급 마케팅에서 보라색을 잘 활용하면 제품의 품격을 높일 수 있다.
보라색은 여성을 상징하는 빨강과 남성을 상징하는 파랑의 조합에서 얻어진다. 그래서인지 보라색은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닌 중성적인 남성적인 면과 여성적인 면을 동시에 띤다. 남성 속에 있는 여성성, 여성 속에 있는 남성성 때문에 동성애을 상징하는 색으로도 유명하다. 연보라 셔츠와 재킷의 윗주머니에 끼워두는 연보라색 손수건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가리키는 은밀한 표시이던 시절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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