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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의 미학

번뇌의 뿌리는 욕망이다(욕망이 因이다)

by 전갈 2022. 6. 28.

2022년 6월 28일(화)

 

부자는 근심이 없을까?

모든 번뇌의 뿌리는 욕망이다. 모든 것의 원인이 곧 욕망, 즉 욕망은 이다. 물질이 영원할 거라는 믿음, 사는 동안 돈과 재물은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욕망을 부른다. 우리가 사는 동안 돈이나 재산은 변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크게 재산을 모으면 죽을 때까지 돈 없는 불편이나 서러움은 없다. 그러니 돈이나 재물을 갖겠다는 욕망이 어찌 생기지 않을까?

 

원하는 만큼 재물을 모으면 만사가 다 해결되는가? 그렇지 않다. 쌓인 재물이 주는 근심과 걱정이 또 있다. 재산을 둘러싼 자식들 간의 분쟁이 생긴다든지, 재산을 어떻게 하면 더 모을까 하는 생각까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걱정이 생긴다. 재물이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걱정과 갈등이 있다. 그래서 번뇌가 끊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재물이 많든 적든 그것에 감사하고 더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글로는 이렇게 쉽게 쓰고 말로는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재물이 너무 없어 불변함을 겪으면 당장 감사한 마음이 사라진다. 스스로 책망한다. 쓰나미처럼 번뇌가 자신을 덮친다. 안다는 것과 행하는 것이 이렇게 다르다. 마음을 비우면, 욕심을 버리면 걱정이 사라진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러나 그것을 실천하는 건 지극히 어렵다.

 

부자들은 행복하게 보이고, 그들은 근심 걱정 없이 사는 것 같다. 그러나 그들도 걱정이 많고 늘 번뇌에 빠져 산다. 귀가 따갑게 그런 이야기를 듣지만, 실감 나지 않는다. 그들도 걱정이야 하겠지만 걱정의 세기와 질이 다를 것이다. 어떤 이는 하루를 걱정하지만, 부자는 더 큰 욕망을 걱정할 것이다. 부자들도 번뇌가 어찌 없을까만 그것의 양과 질이 가벼울 것이라 짐작한다.

 

남의 고통이 아무리 큰다 해도 내 손톱 밑에 가시 박힌 고통보다 덜 아프다는 게 사람들의 생각이다. 그렇다면 가진 자의 번뇌가 갖지 못한 자의 번뇌보다 가볍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어차피 자신이 겪는 번뇌와 고통이 제일 견디기 힘든 법이니까.

 

모든 것은 변하고 사라진다.

붓다는 삼라만상이 일시적이고 변하고 사라진다고 말했다. 그건 억겁의 시간을 두고 하신 말씀일 것이다. 무량억겁(無量億劫)을 생각하면 100년도 채 되지 않는 우리 인생이 얼마나 짧은가? 한갓 먼지보다 작고 지극히 짧은 찰나에 불과하다. 그러니 억겁의 세월 속에서 인생이나 재물이나 돈, 심지어 이 지구의 모든 생명체는 극히 짧은 순간에 존재했다가 사라지는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의 주인이 되어 오늘날 같은 찬란한 문명을 발전시킨 세월도 겨우 20만 년 남짓하다. 한 사람의 인생과 견줘 보면 길지만, 붓다가 말한 억겁의 세월로 보면 아무것 아니다.

 

우리 삶이 찰나이고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부귀영화도 결국 사라지고 소멸한다는 것은 이해가 된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 사는 동안 이것들을 변하지 않고 제자리에 떡 버티고 있는 존재다. 한번 살고 끝나는 생이라면 누구에게든 물질은 실체가 있고 불변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찌 이를 외면하고 갖고자 하는 욕망을 끊을 수 있는가. 번뇌를 버릴 수 없다는 말이 아닌가. 일회성의 삶을 살면서 우리를 둘러싼 물질이나 심지어 애정의 대상까지 소멸하니 마음을 버리라는 말은 논리적 모순으로 보인다. 이것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불교가 말하는 윤회(輪廻), 즉 생명이 있는 것은 여섯 가지의 세상에 번갈아 태어나고 죽어 간다는 육도윤회(六道輪廻)를 인정해야 욕망을 끊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사는 동안 자신이 보인 행실, 업에 따라 가장 고통이 심한 지옥도(地獄道), 굶주림의 고통을 크게 받는 아귀도(餓鬼道), 짐승이나 벌레로 태어나는 축생도(畜生道), 노여움으로 가득한 악다구니를 다투는 아수라도(阿修羅道), 인간이 사는 인도(人道), 행복이 두루 갖추어진 하늘 세계의 천도(天道) 가운데 하나에서 태어난다. 모든 사람은 생전의 업에 따라 이 여섯 세계 중 한 곳에 태어난다면, 현재 사는 세상의 모든 것은 일시적이고 허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윤회의 과정에서는 어떤 것도 영원할 수 없고, 육도 가운데서 어느 하나에 영원히 머무를 수 없다.

 

버리지 못한다면 줄여야 한다.

세상 사람은 누구나 사는 동안 고통을 겪고 번뇌에 빠진다. 오죽하면 사는 건 다 고통이라는 말이 나왔을까. 붓다는 일찍이 인생은 고해(苦海)‘, 고통의 바다라고 말했다. 우리 사는 것이 늘 괴로운 것만은 아니다. 기쁜 일도 있고, 즐거운 일도 있다. 그렇다면 붓다의 말이 틀린 것인가? 그건 아니다. 지금의 기쁨이 고통의 원인이 될 수 있고, 지금의 행복이 다른 불행이 원인이 될 수 있다. 좋은 일이 원인이 되어 더 고통을 안겨주는 일이 허다하다. 붓다가 말한 참뜻은 인생은 기쁨과 고통이 순환하기에 이것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고해(苦海)‘라고 말한 것이다.

 

불교의 내세관을 믿는다면 욕망을 끊어야 할 이유와 당위성도 이해가 된다. 우리 삶은 이 세상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생을 번갈아 맞이한다. 현세에서 내가 부리는 부위와 영화는 아무리 길어도 백 년도 채 되지 않는다. 대신 우리 앞에는 억겁의 세월 속에서 무한반복적인 윤회의 삶이 놓였다. 그렇다면 현세에서 내가 영원히 살 것처럼 부에 집착하고 물질을 가지려 애쓰는 건 어리석기 짝이 없는 행동이다.

 

더 가지려는 욕망은 현세에서 끊임없는 번뇌를 불러오고 생을 고난의 바다로 만든다. 찰나처럼 살다 갈 인생에서 무엇이 영원한가? 모두 일시적이고 소멸할 것이고 허상일 따름이다. 끝없이 반복하는 윤회의 삶에서 인간의 세상에서 지혜롭게 살기 위해서는 욕망을 끊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욕망을 다 버린다면 사람이 어찌 살 수 있을까? 생존과 인간다움을 위한 최소한의 욕망을 남기고 나머지 것들을 줄인다면 사는 일이 한결 편해질 것이다.

 

산다는 것은 짧은 행복과 긴 고통을 반복하는 일이다. 잠시 기쁘다가 이런저런 일이 생긴다. 어쩌면 고통 속에 잠시나마 위로의 시간을 갖는 것이 사는 일인지 모르겠다. 고통과 고뇌의 뿌리가 욕망이고, 욕망은 근심의 인()이다. 욕망을 온전히 벌이지 않고 줄이기라도 하면, 번뇌와 삶의 무게도 한결 가벼워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