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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의 미학

화석이 된 기억

by 전갈 2022. 3. 24.

삼엽충 화석

나이가 들면 세포는 늙는다. 두뇌 속의 신경세포인 뉴런도 예외는 아니다. 어쩌면 뉴런이 더 빨리 노화하는지도 모른다. 새로운 자극이 없고 호기심이 사라지면 뉴런은 돌기를 끊어버리고 스스로 고립을 자초한다. 노인들은 새로운 도전을 싫어하고 단조로운 생활에 안주한다. 그렇게 되면 두뇌의 뉴런들은 급속히 고립되고 소멸의 길을 걷는다. 단기 기억을 저장하는 해마도 급속히 노화가 이루어지고, 젊을 때와 달리 짧은 기억조차 잘 간직하지 못한다. 노인들이 금방 들었던 이야기를 잘 까먹고 건망증이 심해지는 까닭도 따지고 보면 해마의 기억 저하 때문이다.

 

노인들은 오래전에 있었던 일들을 잘 기억한다. 자신의 젊을 때 있었던 경험담을 또렷이 생각해서 되새김질한다. 세월이 많이 흘러 온전히 그때 상황을 그대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유리하게 각색하여 기억한다. 이런 기억들은 두뇌의 장기 기억 저장소에 각인되어 화석 기억이 되었다. 다른 일들은 모두 잊어도 화석 기억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 노인들이 자신의 삶에서 뚜렷이 새겨진 과거의 경험이나 소신을 금과옥조처럼 부여잡고 놓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정의이자 진리이기 때문에 양보할 수 없는 양심의 마지막 보루인 셈이다.

 

노인이 반추하는 기억은 이미 굳어져 화석이 되었기 때문에 어떤 새로운 사실도 그것을 이길 수 없다. 그래서 완고하고 도저히 이해하지 않을 정도로 그것에 집착한다. 그들을 설득하거나 합리적 의견의 장으로 유도할 방법은 없다. 대화는 단절되고 그들의 이야기는 노인 특유의 몸 냄새처럼 곰팡내가 난다. 개인적인 경험을 일반화하는 오류를 자주 범하면서도 그것을 인정하지 못한다. 넘을 수 없는 대화의 벽을 느끼는 건 그 순간이다.

 

사람은 누구나 그런 노인의 길을 걷지 않을까 걱정된다. 방법은 불필요한 대화에 끼지 말고 글을 쓰는 데 더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나만의 시간을 더 늘리자. 낡은 생각에 매몰되지 않으려면 부단히 읽고 쓰고 해서 두뇌의 뉴런을 활성화시켜야 한다. 지적 호기심과 그것을 채우려는 독서에 더욱 매진하여 뉴런들이 새로운 돌기를 뻗어 무한히 팽창하도록 만들 것이다.

 

내 기억은 여전히 진화하고 화석화되지 않는다. 뉴런의 가소성은 활발하고 해마는 여전히 많은 일을 기억한다. 장기 기억이 딱딱한 돌이 되지 않도록 자주 꺼내 신선함을 유지하도록 배려해야 한다. 육체의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기울이는 노력만큼 정신의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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