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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 경제학

인간의 탐욕과 어느 꽃의 멸종 위기

by 전갈 2023. 6. 17.

멸종 위기에 내몰린 광릉요강꽃

“와 꽃이 크고 예쁘다.”

“마치 복주머니처럼 생겼다.”     

 

광릉요강꽃

 

사람들이 광릉요강꽃의 자태를 보고 감탄한다. 4∼5월이면 연한 녹색이 도는 붉은 꽃이 핀다. 우리나라 자생식물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꽃으로 알려졌다. 예쁜 모양을 뽐내는 여러해살이 난초다. 경기도 광릉에서 발견됐고, 요강을 닮았다 해서 광릉요강꽃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잎이 치마를 닮아서 ‘치마난초’로 불리기도 하고 ‘큰 복주머니란’이라 부르기도 한다.      

 

시도 때도 없이 꽃을 캐가는 사람 욕심 탓에 광릉요강꽃은 멸종 위기에 내몰렸다. 혼자 보고 즐기겠다는 탐욕이 광릉요강꽃의 서식지를 황폐하게 만들었다. 뿌리에 곰팡이가 함께해야 꽃이 산다. 곰팡이가 없는 장소로 옮겨 심어 봤자 살기 힘들다. 토질이 받쳐주지 않으면 자리지 못한다. 그것도 모르고 캐가면 애꿎은 꽃만 죽인다. 꽃의 서식지를 파괴하고 곰팡이까지 사라지게 한 사람의 탐욕이 꽃을 멸종 위기에 내몰았다. 

 

2023년 현재 지구에는 약 80억 명의 사람이 산다. 산업혁명 이후 인구가 8배 이상 늘었다. 하지만 지구 전체의 생물체의 수에 비하면 0.01%에 불과한 숫자다. 절대적으로 적은 수의 생명체인 사람은 지구 생명체의 운명을 쥐락펴락한다. 농업혁명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인간의 문명은 겨우 1만 년 정도의 짧은 시간에 파란 지구별의 모습을 완전히 변화시켰다. 

 

인간은 약 45억 년의 장구한 세월 동안 지구가 키우고 보존해 온 자연 생태계를 원래의 얼굴을 찾아볼 수 없다. 겨우 지구 생명체의 0.01%에 불과한 인간의 탐욕 탓에 야생 포유동물의 83%를 멸종됐고, 식물의 절반이 지구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우리 인간이 얼마나 잔인한 학살자인지 잘 알려주는 숫자다. 과연 인간은 무슨 권한으로 지구의 생명체를 이렇게나 많이 멸종시킨 것일까. 바로 더 많은 것을 가지려는 인간의 탐욕과 욕망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놀라운 사실은 또 있다. 대부분 생명체를 멸종시킨 터미네이터인 인간이 오히려 개체수를 증가시킨 생명체도 있다. 고맙게 들리지만, 속내를 알고 보면 그렇지도 않다. 인간이 식용으로 기르는 닭, 오리 등과 가금류는 조류 전체 숫자의 70%가 될 정도로 비정상적으로 많아졌다. 소나 돼지는 모든 포유류의 60%를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인간과 인간이 먹어 치우는 가축을 빼고 야생에서 서식하는 동물은 겨우 4%에 불과하다고 이스라엘 바이츠만과학연구소의 론 밀로(Ron Milo) 교수의 이 말은 인간의 탐욕이 얼마나 흉측한지 짐작하게 해 준다.  

 

포화하지 않는 인간의 욕망이 빚은 비극

정글의 먹이사슬에서 2등과 3등은 1등에게 잡아 먹힌다. 그렇다고 1등이 2등과 3등을 모두 잡아먹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상위 포식자라 해도 먹는 양이 한정되어 있다. 자연의 먹이 피라미드에서 생명들은 치열하게 먹이 쟁탈전을 벌이지만, 적절한 공생의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간다. 상위 포식자도 어느 정도껏 하지 인간처럼 하위 포식자를 아예 몰살하는 경우는 없다.

 

놀랍게도 그칠 줄 모르는 인간의 탐욕은 동식물만 멸종 위기로 내모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인간을 살 자리마저 뺏는다. 다른 사람들을 죽음의 위기로 내몰고 있다. 이 얼마나 충격적인 일인가. 현대 경제는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승자가 독식하고, 패자는 가질 게 없는 구조다. 패자는 생존의 벼랑 끝에 선다. 승리하지 못하면 죽음의 위험에 노출된다. 탐욕과 이기심을 근간으로 한 자본주의적 경쟁의 결과다.

 

그래도 지금은 굶어 죽는 사람은 없지 않으냐, 누구나 열심히 일하면 제 앞가림을 할 수 있지 않으냐, 그러니 이만하면 참 좋은 세상이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도 많다. 삶의 문제는 단지 먹고사는 것만을 해결한다고 끝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그들 속에서 함께 산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남들이 가난을 바라보는 따가운 시선과 멸시의 태도는 영혼을 황폐하게 한다. 

 

과거 공동체 사회는 이러지 않았는데 왜 자본주의 사회는 더 살기 힘든가? 공동체 사회는 공동으로 해야 하는 일이 많았다. 품앗이가 되었든 협동이 되었든 함께하지 않으면 외톨이로는 살 수 없었다. 지금처럼 시장이 발달해 모든 것을 사장에서 살 수도 없었다. 그러니 이웃과 유대를 맺고 서로 돕고 사는 것이 당연했다. 큰일이 생기거나 불행한 일이 닥치면 서로 도왔다. 못 살아도 옛날 사람은 현대인보다 덜 외롭고 덜 고독했다.

 

헝가리 출신의 경제 인류학자 칼 폴라니는 저서 『거대한 전환』(홍기빈 번역, 길, 2009)에서, 원시공동체 사회가 인류의 역사에서 어느 시기보다 더 행복한 시기였다고 말한다. 지금도 밀림이나 정글 오지에서 살고 있는 원시 부족들은 물질 수준은 매우 열악하지만, 현대인보다 더 적게 일하고도 생존할 수 있다. 사냥과 채집 생활을 하는 동물 고기나 과일을 오래 보관할 방법도 없다. 그러니 그들은 더 많이 가지려 욕심낼 까닭도 없다. 그들은 필요한 양만큼 양식을 구하고, 남은 것은 자연의 몫으로 둔다. 

 

먹고사는 문제만 놓고 본다면 원시 공동체 사회가 산업혁명 이전의 어떤 세대보다 유리하다. 현대인이 장시간 노동을 하고 식량을 해결한다. 이에 비해 원시 공동체는 더 적은 시간으로도 식량 문제를 해결했다. 삶의 만족도를 단순히 식량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 그렇지만 원시 부족은 굶어 죽는 사람은 없고, 남이 가진 걸 의식할 필요가 없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물질적으로 풍족한 현대인들과 아주 부족한 이들 중 누가 더 행복할까. 

 

인간을 제외한 지구 위의 모든 생명체는 욕망의 포화점을 갖고 있다. 아무리 최상위 포식자라고 해도 배부르면 사냥을 중단한다. 아무리 치열하게 먹이다툼을 해도 배가 부르면 멈출 줄 안다. 무시무시한 사자들도 배부르면 자리를 떠난다. 그들이 먹다 남긴 음식을 먹고 다른 많은 생명체가 살아간다. 자연은 경쟁하면서 동시에 공생하고, 그래서 조화롭게 살아왔다. 광릉요강꽃의 멸종 위기는 포화하지 않는 인간의 욕망이 낳은 비극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