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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의 미학

식욕 본능과 식탐 쾌락

by 전갈 2022. 3. 25.

이웃사촌 식욕과 성욕

따지고 보면 사람이 먹는 일보다 중요한 일이 그리 많지 않다. 인류가 진화할 때 없어서 안 될 두 가지 본능이 있다. 식욕과 성욕이 그것이다. 먹어야 하는 욕구는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하다. 매일 음식을 섭취하여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받아야 한다. 종족의 보존하기 위한 인간의 가장 원초적이고 기본적인 조건이 식욕의 충족이다. 성욕은 종족의 번식을 위해 그 중요성을 따라 설명할 필요가 없다. 섹스에 대한 본능적 욕구가 없었다면 인류는 지금과 같이 번성한 인구를 만들 수 없었을 것이다. 인류는 식욕으로 삶을 유지하고 성욕으로 종족을 유지해 왔다. 성욕과 식욕이 인간의 종족 보존을 위한 생물학적으로 중요한 욕망이다. 어느 하나라도 부족하다면 인간은 오래전 멸종되었을 것이다.

 

사람의 뇌에 자리하여 식욕 호르몬을 조절하는 식욕 중추와 성욕 호르몬을 조절하는 성욕 중추가 시상하부(Hypothalamus)에 같이 자리한다는 주장도 있다. 식용 중추와 성욕 중추 사이의 간격은 불과 1.5mm에 불과한 아주 가까운 거리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식욕과 성욕이 같은 감정의 뿌리에서 나온 사촌 간이라 여겨도 좋다는 말도 있다. 뇌에서 시상과 시상하부 영역이 사람의 감정 혹은 욕망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에 나오는 주장들이다. 인간의 뇌는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기에 단언하기는 힘들다. 그렇지만 식욕과 성욕의 상관을 이야기는 하는 말들은 많이 전해온다.

 

사람들이 섹스만큼이나 먹는 것에 대한 탐욕이 강한지 이해가 된다. 요리에 대한 욕망과 성에 대한 욕망은 인류의 생존과 직결된 원초적 욕망이다. 식욕과 성욕은 본래 그 근원이 같고 서로 통한다는 점에서 서로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에게 식욕을 통제하는 능력이 없다면 인간이 동물 가운데서 가장 잔인하고 사악한 존재라고 하였다. 그는 섹스에 관한 인간의 욕망을 조절할 능력이 없다면 역시 가장 잔인하고 사악한 존재로 전락한다고 하였다. 식욕과 성욕이 비슷한 모습을 보이며 욕망을 조절하는 뿌리가 두뇌의 같은 장소인 시상하부에 있기 때문이다.

 

식욕은 성욕과 함께 더불어 가장 오랫동안 인간의 마음을 뒤흔드는 점에서는 같지만, 욕망의 지속 기간에서는 많은 차이가 있다. 사춘기가 되어서 나타났다가 육체가 노쇠하면서 점차 퇴색하는 섹스의 욕망과 달리 식탐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사람의 마음을 한시도 떠난 적이 없다. 어느 시대이든, 어느 문화권이든 식욕은 원초적 욕망이자 삶이 다하는 순간까지 계속되는 욕망이다. 이렇듯 식욕은 훨씬 태어나는 순간부터 시작되고 건강에 이상이 없다면 죽는 순간까지 존재하는 인간의 욕망이다. 또 음식을 먹는 일은 은밀하게 간헐적으로 진행되는 섹스에 비해 음식을 먹는 일은 훨씬 더 공개적으로 매일 반복적으로 일어난다. 따라서 우리는 섹스의 탐구에 기울이는 관심 이상으로 식욕을 탐구하는데 쏟아야 한다.

 

 

식탐과 두뇌의 환각

프랑스의 신경생리학자 장 디디에 뱅상(Jean-Didier Vincent)<뇌 한복판으로 떠나는 여행>에서 음식을 먹었을 때 얻는 쾌락은 두뇌의 착각이라고 주장한다. 기름기가 좌르르 흐르는 잘 익은 한우는 보는 순간에 사람의 입맛을 다시게 만든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한우식당에 들어가서 고기를 주문한다. 친구들과 함께 쉴 새 없이 젓가락질하면서 연신 입으로 고기를 집어넣는다. 한우의 부드러운 육질이 입안 가득히 퍼지고 고기의 연한 질감이 기쁨을 안겨준다. 이렇게 먹다 보면 어느새 탁자 위에는 집시가 산더미처럼 싸인다. 배는 이미 그득 차서 포만감을 느껴도 여전히 고기는 우리를 유혹한다.

 

치명적이고 매혹적인 붉은색, 마치 하얀 이슬이 군데군데 눈꽃처럼 퍼진 마블링, 숫불 위에 구우면 금방 육즙이 배어날 것 같다. 고소한 향이 퍼질 때면 어느새 젓가락은 고기 위에서 춤을 춘다. 그러다 보면 나도 모르게 포식을 하고 부른 배를 두드리게 된다. 몸은 이만하면 됐다고 아우성쳐도 한번 떠난 젓가락을 되돌릴 수 없다. 두뇌가 계속해서 즐거움과 포만감을 재현하라는 명령을 내리기 때문에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것이다. 식욕과 식탐을 끊기 힘든 까닭은 바로 만족할 줄 모르는 쾌락에 대한 두뇌의 욕망 탓이다.

 

이처럼 음식을 먹는 행위는 평생 끊을 수 없는 본능이다.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음식을 섭취해야 하고 음식의 소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에너지를 섭취해야 한다. 따라서 음식을 먹는 행위는 인간의 다른 어떤 생존을 위한 욕구보다 더 중요하다. 우리는 매일 몸을 움직이고 활동을 하는 데 필요한 1,500~2,000칼로리의 열량을 섭취해야 한다. 만일 그만한 열량의 에너지를 섭취하지 못하게 되면 제대로 활동할 수 없고 몸이 약해지고 생명을 부지하기 힘들게 된다. 먹는 일은 욕망이면서 생존의 본능이다.

 

요리의 철학적 관점

철학적 관점에서 보면 요리는 인간의 생존 욕망을 드러내는 원초적인 욕구이다. 잡식성 동물인 인간이 가진 생존을 위한 본능을 충족하는 욕구가 식욕이다. 그러나 생존에 필요한 에너지를 섭취하는 이상의 식욕은 욕망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비단 요리뿐만 아니라 사람의 소비 활동에 적용할 수 있는 개념이다. 생활에 꼭 필요한 주거나 의복의 소비는 생존을 위한 기본 욕구이지만 그 이상의 과시적 욕구는 욕망이라 할 수 있다.

 

과거 철학자들은 식욕에 대한 본능적 욕구를 넘어선 욕망은 건강이나 기본적인 행복과는 관련이 없다고 보았다. 소크라테스는 음식에 대한 욕망을 담은 요리를 우리의 건강과는 무관한 단순한 즐거움을 위한 것이라고 보았다. 플라톤은 맛있는 것을 만드는 영혼의 추상적 고양이 아닌 감각적 삶으로 보았다. 감각과 쾌락에 비교적 관대했던 아리스토텔레스도 음식을 섭취하는 인간의 행위를 식물과 동물의 수준으로 보았다. 인간의 모든 쾌락을 선이라고 본 쾌락주의자 에피쿠로스조차도 미각의 즐거움은 영혼을 혼란에 빠트린다고 경고했다. 고대의 철학자들은 생존의 수준을 넘는 요리는 행복과 무관한 의존적 열정이고, 건강에 나쁜 감각적 쾌락일 뿐이라고 말했다.

 

괴테는 요리를 좋아하는 미식가로서 사랑하는 여인에게 구애의 편지를 보낼 때 달콤한 과자나 요리를 함께 보냈다. 장 폴 주아리(엘불리의 철학자)에 따르면, 니체는 음식이 사람의 생각이나 사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통찰력을 보였다. 근대의 철학자인 헤겔은 영양 섭취 활동이 가장 유기적인 행동이자, 그 방식을 개발하는 모든 행위 속에 가장 수준 높은 인간미가 내포되어 있다면서 요리를 칭찬했다.

 

 

쿡방, 먹방 그리고 텔레비전

최근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요리 열풍도 먹는 것에 대한 강한 욕망으로 인한 것이다. 눈을 뜨면 요리에 관한 기사를 보고 셰프들이 만드는 요리를 방송으로 본다. 지면 가득 유명한 요리사에 관한 기사가 실린 신문을 읽는다. 한때 대한민국은 요리의 열풍에 빠졌다. 요리를 좋아하기로는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관심이 많은 중국 못지않게 우리도 요리를 좋아하게 되었다. TV의 요리 프로그램이 크게 유행하는 것은 세계적인 추세가 되었다. 미국과 영국에서는 요리 프로그램이 크게 히트를 하였고 수많은 시청자를 확보하였다. 고든 램지나 제이미 올리버는 방송에서 요리를 통해 세계적인 요리사로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일본에서도 고독한 미식가와 같은 요리 드라마가 큰 인기를 끌었다.

 

사람들이 왜 이렇게 요리 프로그램에 열광할까? 직접 먹어 볼 수는 없지만 음식의 화려한 색감, 음식을 만드는 퍼포먼스, 신선한 음식 재료, 그리고 화려한 성찬. 마음 같아서는 직접 해보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잘 아는 사람들은 방송을 통해 욕망을 충족한다. 욕망의 대리만족이라고 할까? 아름다운 여배우나 잘 생긴 남자 배우를 보면서 성적 욕망에 관한 상상을 펼치듯, 방송에 나오는 화려한 음식을 통해 욕망의 나래를 펼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얀 요리복을 멋지게 차려입은 셰프의 몸동작은 주부들을 열광하게 만든다. 바야흐로 요리사들이 연예인의 반열에 든 셰프들이 종횡무진 예능 프로그램에서 활용하는 셰프 테이너의 시대가 열렸다.

 

최근 케이블 TV는 음식의 욕망을 자극하며 요리 예능프로그램 시대를 이끌고 있다. tvN삼시세끼’, JTBC ‘냉장고를 부탁해’, 올리브TV신동엽, 성시경은 오늘 뭐 먹지는 시청률에서 케이블 TV가 갖는 불리함을 뛰어넘어 지상파의 요리 프로그램을 압도하고 있다. 케이블 TV는 지상파의 맛집 소개 위주의 프로그램 형식을 과감히 탈피하고, ‘남자 셰프들이 요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매력적인 남자들의 재치 넘치는 입담과 요리하는 멋진 모습에 여성들의 마음이 동하지 않을 수 없다. 훈남 셰프들이 주도하는 요리 프로그램은 시청자의 침샘을 자극하면서 동시에 환상을 자극한다. 여성 시청자는 그들을 보면서 내 남자친구혹은 내 남편의 이상형을 마음속에 그린다. 현실의 허전한 욕망에 대한 대리만족이다.

 

요리, 컬러풀 퍼포먼스

 

요리 문화는 만드는 시각적 과정과 먹는 미각적 과정에서 동시에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있다. 음식 재료를 구하고 다듬고 요리하는 과정도 재미있는 문화 상품의 원천으로 등장하였다. 만드는 과정은 눈으로 관찰하는 다양한 시각적 즐거움을 주고 누군가가 그 음식을 먹는 장면은 욕망의 대리만족감을 느낀다. 다양한 음식 재료와 그것이 갖는 색채감, 느껴지는 질감 등이 컬러 TV의 발전으로 더욱 선명하게 펼쳐진다. 강렬한 빨강의 유혹, 노란색 파스타의 매혹적인 식감, 하얀 면발 위에 뿌려지는 오렌지색의 토마토소스, 자연을 담아온 아스파라거스의 짙은 녹색은 마치 캔버스 위의 화려한 색채에 뒤지지 않는 아름다움이다. 한편의 명화를 감상하듯 사람들은 형형색색의 요리의 세계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요리만큼이나 상업적으로 왕성하게 소비되는 아이템도 많지 않다. 한순간도 소비를 멈출 수 없고 새로운 형태의 소비를 갈망하는 것이 요리와 음식이다. 요리와 음식은 매우 광범위한 수요층을 확보하며 요리 산업은 높은 성장세를 보여준다. 시청률을 먹고 사는 방송사는 적은 돈으로 시청률을 올리는 소재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먹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보여주는 요리의 퍼포먼스는 많은 시청자를 불러 모을 수 있어 꾸준히 방송을 내보내는 아이템이다. 세계적으로 요리 프로그램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일정한 수준의 시청자를 확보할 정도로 인기를 끈다.

 

디지털 혁명이라 불리는 정보통신기술의 눈부신 발전은 음식에 관한 사람들의 관심을 먹는 것에서 보고 만드는 것으로 확장하였다. 포만감이라는 원초적 욕망을 시각과 감각을 느끼게 하는 미학적 욕망으로 발전시켰다. 타인이 음식을 만드는 과정을 지켜보고 화려한 색채와 퍼포먼스에 매료된다. 디지털 기술의 발달은 요리의 산업화와 방송 콘텐츠 제작 테마로 폭발적 성장을 주도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자신이 직접 요리를 하는 전 과정과 음식을 먹는 장면들을 올리고, 맛있는 음식점의 요리 사진과 느낌을 올리기도 한다. 스마트 폰의 보급은 많은 식당에서 젊은 여성들이 음식을 먹기 전에 먼저 사진을 찍는 열풍을 주도하였다. 이렇게 찍은 사진을 블로그에 올리거나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등의 사회적 관계 네트워크에 올리는 일이 유행이 됐다.

 

시청률과 푸드 욕망

사회가 평화롭고 먹고살기가 편안하면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을 조절하고 만족할 수 있다. 사람답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기본적으로 즐길 수 있다면 타인의 삶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소득 분배가 고르지 못하고 부자와 가난한 계층 사이에 부의 차이가 클수록 사람들은 상대적 박탈감에 내몰리게 된다.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동경을 대리만족을 통해서라도 느끼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소득이 있다 하더라도 상대적으로 가진 양이 적을수록 갖지 못한 것에 동경은 커진다. 가진 사람은 자신들의 소비를 과시할 것이고 가지 못한 사람들은 부러움과 질시의 눈으로 쳐다볼 것이다.

 

TV 프로그램은 욕망의 흐름을 정확하게 읽어낸다. 빈틈을 헤집어 욕망의 상대적 빈곤을 자극함으로써 시청자를 확보한다. 갖지 못한 것을 방송으로 보여줌으로써 마치 가질 수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효과를 유발한다. 스스로 채울 수 없는 욕망이 마치 방송을 시청함으로써 충족된 듯 하는 대리만족을 느끼게 한다. 자신의 처지가 부족할수록 신데렐라의 환상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일들이 동화 속에서 이루어지고 드라마 속에서는 이루어진다. 마치 내가 주인공이 된 것과 같은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영화나 드라마가 주는 가상을 현실로 착각하게 하는 상징 조작으로 현대인은 일상을 사는 셈이다.

 

드라마 속의 사랑은 그것이 불륜이라 해도 달콤하다. 현실에서 경험하지 못한 애틋함과 신분의 격차를 뛰어넘는 긴장감이 있다. 쓴맛만 남은 식은 커피처럼 열정이 사라진 사랑이 항상 뜨겁게 타오르고 있다.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메릴 스트립과 크린터 이스트우드의 사랑이 세속적인 잣대로는 불륜임에도 불구하고 애틋함을 준다. 마치 자신이 주인공이 된 것과 같은 착각에 빠진다. 가질 수 없는 것을 영화나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어 가지는 것과 같은 환상이다. 어느새 주인공의 욕망이 내 욕망으로 전이된다.

 

음식에 대한 우리들의 짝사랑도 기본적으로 욕망의 대리만족을 전제로 하고 있다. 화려하고 세련된 차림의 요리사들과 깔끔하게 정리된 세트장의 주방, 얼굴값을 하는 연예인들의 화려한 입담, 이들과 웃고 즐기는 사이에 완성된 요리의 정갈함에 사람들은 빠진다. 맛을 보는 사람들의 놀라운 표정, 환상적인 맛에 대한 평가, 처음에는 과장되었다고 생각하더라도 어느새 그것이 사실처럼 느끼게 된다.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작가들의 세밀한 장치로부터 빠져나갈 수 없다. 텔레비전 앞에 바싹 붙어 앉아 입맛을 다시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직접 맛보지 않고 유명 연예인이 입맛을 다시는 것만으로도 대리만족의 효과는 충분하다.

 

대한민국이 요리 열풍에 휩싸인 것에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다. 욕망과 소비의 교차점에서 요리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섹스보다 더 강하고 질긴 요리에 대한 사람들의 갈망은 원초적 본능을 넘어 소비적 욕망으로 진화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무분별한 방송의 요리 열풍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 1주일 내내 지상파와 종합방송채널, 케이블 채널이 모두 요리 프로그램을 내보는 현실은 욕망의 과잉이다. 치열한 시청률 경쟁에서 더 자극적인 요리 프로그램을 선보이는 것은 케이블 방송의 포르노 프로그램과 차이를 발견하기 힘들어진다. 어차피 식욕과 성욕이 같은 시상하부에 뿌리를 둔 욕망의 형제라고 볼 때,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요리 방송이 과연 음식을 소재로 한 성적 욕망의 자극과 무엇이 다를까? 요리에 관한 광풍이 음식 포르노로 빠지지 않을까 염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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