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월 28일(토)
낙화
- 이형기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 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꽃잎 떨어져 나무와 결별하면, 그 자리에 열매가 맺힌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오고 가을이 결실을 맺으려면, 나무는 봄날 싹트는 눈, 여름의 무성한 잎과 꽃과 결별해야 한다. 이룩한 모든 것들과 헤어지지 않고는 가을의 결실을 맺을 수 없다. 이것은 나무의 숙명이다. 해마다 반복되는, 어느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수많은 결별이 있기에 가을날 열매 맺는 축복을 얻을 수 있다. <낙화>에서 이형기 시인은 결별의 아픔을 통해 사랑이 완성된다고 말한다.
결별을 축복으로 받아들이면 마음이 얼마나 단단해야 할까? 떠나야 할 때가 언제임을 분명히 안다는 건 또 얼마나 힘든 일일까? 쉽지 않음을 우리는 잘 안다. 혹시나 하는 미련과 아직도 하는 마음이 떠나야 할 시기가 왔다는 걸 알아채지 못하게 한다. 뭉그적거리다 보면 결별이 주는 축복을 이룰 수 없다. 때를 놓쳐 말라비틀어져 떨어진 초라한 낙엽이 되어 사람의 발길에 차이는 신세가 된다. 봄날 때를 놓치지 않은 꽃들의 화려한 자유낙화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것과 사뭇 대조되는 풍경이다.
8월 24일(화)~27(금)까지 3박 4일 동안 강원도 라마다 호텔&스위트 호텔에서 평가 업무를 진행했다. 강원도는 워낙 산세가 좋아 어딜 가도 풍경이 수려하다. 평창은 태백산맥 동쪽에서 동대산(1,434m), 황병산(1,407m), 매봉(1,173m), 선자령(1,157m), 발왕산(1,458m) 등 높은 산과 봉우리를 품은 곳이다. 평창군 대관령 면은 높은 산들로 둘러싸인 해발고도 700m 이상의 평탄한 지형과 구릉성 산지로 이루어진 곳이라, 그 곳에서도 지대가 높은 곳에 자리한 호텔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한 폭의 그림이다. 호텔에서 불과 1.7킬로만 가면 2018년 2월에 열린 동계올림픽 주경기장이라 볼거리가 제법 많다. 평가 업무만 진행하기엔 너무 아쉬울 정도로 휴식을 취하기에 그만이다. 올해가 가기 전 꼭 다시 들러서 며칠 묵고 가리라는 속절없는 약속을 해본다.

호텔에 머무는 사흘 내 비가 내린다. 8월이 아직 남았는데 벌써 가을장마가 시작된 걸까? 풀잎과 관목도 그리고 소나무가 바람에 몸을 흔들자 사방으로 빗방울이 흩어진다. 온 종일 내린 비에 젖어 가늘게 떠는 애처로운 들꽃이 눈에 밟힌다. 꽃잎 사이 밴 빗물이 어느새 내 가슴을 물들이다. 노린 색과 빨간 색 꽃잎 물든 내 가슴을 가만히 내려본다. 희뿌연 안개비 내리는 숲을 보노라면 어느새 안개는 그리움이 되어 천지사방으로 퍼진다. 해발 2,500미터가 넘는 산세 험한 에티오피아의 예가체프Yirga Chefe 산 커피 향이 방안 가득히 퍼진다. 이런 날이면 짙은 커피 향마저 안개비에 젖어 촉촉이 가슴 속으로 스며든다.
이른 아침 잠깐 비 그친 새를 틈타, 호텔 밖으로 나간다. 호텔 아래쪽으로는 고랭지 무밭과 배추밭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졌다. 수확을 앞둔 무는 흙을 밀어내고 매끈하게 빠진 하얀 다리를 내보인다. 희다 못해 투명한 무와 짙은 초록의 무청은 평창의 여름은 이미 끝물임을 말한다. 며칠 지나지 않으면 이들은 도회의 어느 이의 식탁에 오른다. 대관령의 숨결과 짙은 숲속 향기를 가득 담은 무는 평창의 여름 소식을 전할 것이다.
무밭을 지나 조금 더 아래로 걷다보면, 작은 다리를 중심으로 세 갈래 갈림길이 나온다. 호텔과 맞닿은 길을 내려온 터라 시내와 반대 방향인 왼쪽으로 발길을 향했다. 좁은 밭 사이로 드문드문 코스모스가 피어 대관령에는 벌써 가을이 왔음을 알린다. 길옆 밭에는 속이 실하게 찬 고랭지 배추가 수혹을 앞두고 있다. 강원도의 여름을 견뎌낸 배추는 꽉 찬 속을 부끄럽게 내보인다. 대관령의 배추는 영락없이 옷고름 불고 배시시 웃는 새색시를 닮았다.
숲을 향해 조금 더 걸어가니 빨간색이 잘 어울리는 앙증맞은 건물이 보인다. 아직 8시도 되지 않은 아침이라 문이 닫혀 있다. 문밖에 적힌 글자를 보니 호텔 투숙객이나 대관령에 놀러온 사람들이 찾는 맛 집이다. ‘큰골’이라는 가게 간판이 높이 달려 있다. 가게 옆으로는 며칠 째 내린 비에 물소리가 제법 요란한 개울이 있다. 개울이 보이는 곳에 의자와 테이블이 놓여 있어 맛 집치고는 꽤 운치가 있는 곳에 자리했다. 빨간 건물을 지나쳐 숲속으로 걸어갔다. 숲 깊숙한 곳까지 배추밭이 펼쳐진다. 여름을 마무리하고 가을을 준비하는 숲속에는 초록이 짙다 못해 검은 빛을 띤다.

산책을 마친 나는 지하 2층의 평가 장소로 갔다. 전국에서 모인 130명의 교수와 함께 합숙하면서 일했다. 한참 전부터 이 일을 해온 나로서는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경험하면 일을 쉽게 처리할 수 있다. 그건 능력이 많고 적음과는 관계가 없다. 누구나 경험을 쌓다보면, 저절로 일이 손에 익는 법이다. 처음 참석한 사람 입장에서야 아득하게 보이지만, 그들도 내년이나 내후년이면 숙달된 경험자가 될 것이 분명하다. 이런 형편을 안다면 내가 잘났다고 중뿔나게 자랑할 거 하나 없다.
“장강후랑추전랑(長江後浪推前浪)‘
’양자강의 앞 물결은 뒷 물결이 밀어낸다.‘
나이가 많고 적음이 아니라, 어느 정도 위치에 서면 물러가야 할 때를 헤아려야 한다. 비교적 이른 나이인 30대초부터 학교의 일을 해온 나로서는 나이에 비해 많은 경험을 쌓았다. 일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더 이상 그 일들이 주는 신선함이 사라진 상태다. 자칫 매너리즘에 빠지기 쉬운 상황이라 그 일에서 물러나 공부에 매진해야 한다. 가을이 결실과 결별하듯, 떠나야 할 때 떠나야 한다. 새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하도록 해야 한다.
'느림의 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부... (0) | 2022.03.27 |
---|---|
포도는 시고 감은 떫다. 그렇다고 손가락만 보고 달을 잊는다는 건... (0) | 2022.03.27 |
'지혜의 시대와 어리석음의 시대' 그리고 룰스 레스토랑 (0) | 2022.03.25 |
몽마르뜨와 거리의 화가 (0) | 2022.03.25 |
1만 시간의 독서와 도끼 (0) | 2022.03.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