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15일(금)
최고이자 최악의 시간
“최고의 시간이었고, 최악의 시간이었다. 지혜의 시대였고,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믿음의 세기였고, 불신의 세기였다. 빛의 계절이었고, 어둠의 계절이었다. 희망의 봄이었고, 절망의 겨울이었다. 우리 앞에 모든 것이 있었고, 우리 앞에 아무것도 없었다.”
찰스 디킨스가 쓴 소설 <두 도시 이야기>의 처음에 나오는 글이다.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를 기가막히게 대비시켜 프랑스 혁명을 전후한 시대의 양면성을 잘 드러냈다. 최고도 될 수 있고 최악도 될 수 있는 혼돈의 시대를 잘 표현했다. 어쩌면 지금도 그때와 별반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늘 희망의 봄과 절망의 겨울 사이를 방황하고 있다.
코벤트 가든 마켓의 끝자락 골목길을 돌아서면 룰스 레스토랑을 만난다. 1798년 문을 연 Rules 레스토랑은 굴 요리 전문점(oyster bar)으로 출발하였다. 200년이 넘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곳이다. 지금도 다양한 전통 영국 음식을 제공하는 런던의 마지막 클래식 레스토랑이다.
이곳은 한때 영국의 문화와 예술계 인사들의 단골집으로 이름을 날렸다. 지금도 레스토랑 벽에는 <크리스마스 캐롤>의 저자인 찰스 디킨스의 낙서가 남아 있다. 어쩌면 찰스 디킨스가 <두 도시 이야기>의 아름다운 도입부를 이곳에서 구상하지 않았을까?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세계적인 희극 배우인 찰리 채플린도 런던에 있을 때 이곳을 자주 들렀다고 하니 그 유명세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산업혁명의 성공으로 영국의 경제가 한층 풍성하던 시절, 영국 최고의 지성들이 즐겨 찾았던 장소이니 당시에는 그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을까?
쇼팽의 녹턴(nocturne)이 감미로운 밤
오래전 런던 출장가는 길에 룰스 레스토랑을 찾았다. 쇼팽의 녹턴이 감미로운 룰스 레스토랑 내부를 들러 보았다. 한눈에 봐도 그림이나 액자가 레스토랑의 역사를 말해 준다. 오랜 시간을 견디느라 색이 바래 탓에 앤틱한 멋이 넘치는 가구들이 전통을 말해준다. 손때 묻어 반질해진 의자, 짙은 갈색으로 중후한 멋을 풍기는 테이블이 만만치 않은 시간을 견뎠음을 보여준다. 룰스 레스토랑은 디킨스가 말한 '지혜의 시대와 어리석음의 시대'를 보낸 것이다.
양복을 정중하게 차려입은 웨이터가 와서 교과서에서 배운 영국식 영어로 주문을 받는다. 우리는 주어진 시간과 예산을 적절하게 계산하여 최고로 만족할 수 있는 요리를 주문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경제학을 전공한 내 이야기이고 실제 레스토랑에 가서 이런 것을 따져가면서 음식을 주문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의식하지 못해도 무의적의 세계에서는 한정된 예산과 욕망의 극대화를 실현하려는 것이 인간의 경제적 활동의 본질인 것도 사실이다.
하얀 수건으로 손을 두른 웨이터에게 자연산 굴 요리와 소갈비, 그리고 소 엉덩이 부위로 만든 럼프 스테이크(rump stake)를 주문하였다. 물론 가벼운 음료수를 곁들이고 전채요리인 샐러드를 함께 주문하였다. 일행 중 두 사람의 요리 전문가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직관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성찬을 주문할 수 있었다. 요리 전문가의 통찰력으로 빠듯한 예산으로 만족도를 극대화해야 한다는 경제학의 골치 아픈 문제를 가볍게 해결하였다.
일행 세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양을 주문한다. 2.5파운드 가격의 자연산 굴 2인분, 16.95파운드의 크렙 샐러드(crab salade), 32,5파운드의 소갈비, 26.95파운드의 럼프 스테이크, 8.5파운드의 그린 샐러드, 3.5파운드의 아메리카노 2잔, 3.파운드의 초콜릿을 주문하였다. 그리고 이것저것 몇 가지 추가 주문을 하니 100파운드가 조금 넘는다. 당시 우리 돈으로 하면 20만원 남짓하다.
주문한 음식이 차례로 나오는데 생각보다 양이 많았다. 풍성하게 차려진 요리를 하나씩 음미할 때마다 미식가가 된 듯 기쁨이 몰려온다. 영국에서 제일 오래된 전통 레스토랑에서 먹는 맛이라 그런지 몰라도 다른 어떤 곳에서 먹어본 음식보다 훌륭하다. 한 시간을 훌쩍 넘긴 저녁을 마치고 우리는 비용이 아깝지 않았다.
룰스 레스토랑은 행복한 포만감을 주었다. 200년이 넘는 역사와 찰스 디킨스의 시대를 음미했다는 영혼의 포만감까지 덤으로 받았다. 그날 밤 런던의 밤 하늘은 유난히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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