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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의 미학

현불사 첫 번째 이야기

by 전갈 2022. 3. 28.

2021년 8월 15일(일)

 

깨완수토굴의 아침

2021년 8월, 3사 여행 둘째 날, 여름 한복판의 날씨 같지 않은 서늘한 기온에 자연스레 눈을 떴다. 깊은 산골이라 해도 한여름의 아침 6시면 날은 진작부터 훤하다. 숙사 문을 여니 청량한 아침 공기가 거침없이 내게 안긴다. 이슬에 젖을까 툇마루에 올려놓은 신발을 고쳐 신었다. 툇마루에 앉아 졸고 있던 고양이 녀석이 내 발소리에 게슴츠레 눈을 뜬다. 게으른 걸음으로 마루를 내려가는 녀석을 뒤로 한 채 산책길에 나선다.

 

먼저 숙소를 자세히 둘러보았다. 21실치고는 둘이 자기에 좁지 않은 방들이 줄지어 있다. 숙소 방마다 이름이 붙어 있다. 그 중 깨완수토굴이라는 방이 눈길을 끈다. 주지 스님께서 직접 지은 이름이라 하니 뭔가 심오한 뜻이 있으려니 짐작한다. 무슨 뜻일까 궁금하던 차에 스님을 뵐 때는 정작 여쭙지를 못했다. 다음에 오면 잊지 말고 주지 스님께 꼭 물어보리라 다짐한다.

 

깨완수토굴

 

 

마당 앞 풀들도 여름 한 철 제 세상인 양 짙은 녹색을 자랑한다. 마당 한 견에는 마른 장작더미가 쌓였다. 생뚱맞게 저녁에 모닥불을 피우고 바비큐 파티를 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심 깊은 산사에서 가당치 않을 거라 지레짐작했다. 함께한 교수님이 숙소는 법당과 가깝지만, 사찰의 경계 밖에 있어 삼겹살에 소주 한 잔의 호사를 누릴 수 있다고 말한다. 공기 좋고 물소리 좋은 이곳에서 소주에 삼겹살을 곁들이면 이태백의 호연지기를 능히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다음에 오면 술이 석 잔이면 큰 도를 깨치고, 한 말의 술이면 자연과 통한다.‘는 그의 기개를 꼭 실천하리라 다짐한다.

 

클로드 모네 '수련' 속 다리

어제는 늦은 밤이라 몰랐지만, 숙소 앞의 개울에는 귀엽고 앙증맞은 다리가 놓여 있다. 모네의 그림 수련을 빼닮은 풍경이다. 모네가 활동하던 1800녀대 중반 유럽의 화가들은 일본의 민속화에 푹 빠졌는데, 그들의 일본풍에 대한 사랑은 자포니즘(Japonism)이라는 사회적 유행을 만들었다. 그 중에서 특히 클로드 모네는 일본 전통 의상인 기모노를 입은 자신의 아내를 그릴 정도로 일본풍에 빠졌다. 그런 그는 말년에 파리 교외 지베르니에 일본식 정원을 만들고, 물위에 일본식 다리를 놓았다. 일본과 한국의 개천 위에는 대개 나무나 돌로 만든 아치형의 다리가 놓여있다. 현불사 숙소 앞 다리가 모네의 그림 수련속 다리를 닮았다는 느낌이 든 것은 그런 연유에서이다.

 

황금 닭이 알을 품다.

숙소에서 불과 몇 걸음 떨어져 있지 않은 현불사 본당으로 발길을 향했다. 현불사는 조계종의 적통을 이은 대사찰인 설악산 신흥사의 말사로 등록되어 있다. 왕금산(王金山)의 품속에 안긴 현불사의 모양은 마치 황금색 닭이 알을 품은 금계포란(金鷄抱卵)의 아름다운 모습이다. 현불사의 오른쪽과 왼쪽으로 왕금산의 힘찬 기세가 뻗어있고, 앞쪽으로 모네의 수련을 닮은 다리 아래로 맑은 물이 흐른다. 그야말로 좌청룡 우백호에 배산임수의 상서(祥瑞)러운 기운이 넘치는 명당이다. 본당에서 내려다본 마당 우측에는 요사채인 취정선원이 자리하고, 왼편으로는 곧게 자란 소나무가 군락을 이룬 숲이 있다. 붉은 황토 위에 긴 다리를 뽐내는 소나무들을 보니 이곳의 토질이 빼어나게 좋다는 걸 알게 한다.

 

현불사 진묘원

 

 

현불사에는 우리나라 사찰에서 볼 수 있는 일주문(一柱門)이 없다. 이것은 사찰에 들어가는 첫 번째 문으로 기둥이 일자로 서 있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일주문은 신성한 가람에 들어서기 전에 세속의 번뇌를 씻고 진리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상징적인 뜻을 담고 있다. 말하자면 속세와 부처의 가르침 사이에 경계를 짓는 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현불사는 일주문을 세우지 않아 완전히 개방된 모양새다. 중생들이 자연스레 부처의 세계에 들어와 시작과 끝의 경계를 구분하지 않고 언제나 불법과 함께하도록 배려한 것이다. 절과 내가 사는 곳이 서로 다름이 아닌 하나임을 말하려고 한 것은 아닐까. 어쩌면 불법(佛法)의 바다를 향한 개방적 플랫폼일 것이라 짐작해 본다. 

 

현불사의 또 다른 특징으로 부처를 모신 본당에 현판이 없다. 우리나라의 사찰에서 볼 수 있는 대웅전(大雄殿)이나 적광전(寂光殿) 같은 불교 경전에서 깨달음을 의미하는 이름의 현판이 붙어 있지 않다. 본당을 진묘원(眞妙院)이라 부르는 것으로 봐서 본당의 이름은 있지만, 구태여 현판을 붙이지 않는 것으로 보면 이름으로 건물의 성격 제한하지 않으려는 뜻이라 짐작한다. 진묘원은 진공묘유(眞空妙有)라는 말에서 따온 것이다. 이때 진공묘유에서 진공(眞空)은 참된 공()은 절대적으로 고정되거나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뜻이고, 묘유(妙有)는 그래서 신기하게도 세상은 존재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진공묘유는 세상에서 절대적으로 고정되고 변하지 않는 실체는 없고,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세상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한강은 강원도 깊은 산골짜기에서 발원하여 산굽이를 돌고 돌아 서울을 향해 흘러간다. 유장하게 흐르는 한강의 모습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다른 모습으로 보인다. 빨간 단풍잎 떠 있는 가을의 한강과 한겨울 얼음 언 한강의 모습은 분명 서로 다르다. 심지어 물안개 핀 아침의 모습과 광폭한 8월의 태양이 뜨거운 한낮의 모습이 서로 다르다. 어느 한순간 혹은 어느 한 구간을 잘라 이것만이 한강이라고 할 수 없다. 한강이라는 이름의 강은 분명 실제로 있지만, 특정 구간이나 특정 시기에만 한강이라 부르는, 즉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지 않는 한강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한강은 절대 불변하는 존재가 아니라 시시각각 모습을 달리하면서 흘러간다. 이처럼 늘 변하기에 약 500킬로미터 길이의 한강은 오늘도 유장하게 흘러간다.

 

땅속 깊이 묻은 수도관 속으로 흐르는 물은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모습일 것이다. 만일 수도관이 외부의 기온 변화에도 영향을 받지 않도록 설계가 되었다면, 계절이나 장소가 아무리 바뀌어도 수도관 속의 물은 변함이 없다. 그렇다고 해도 그 수도관이 변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수도관 속을 흐르는 물로 인해 수도관에는 아주 미세하지만, 변화가 일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세상의 모든 물상은 절대 변하지 않는 존재가 없고, 그 변화 때문에 사물은 존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세상에는 절대로 변하지 않는 존재란 처음부터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 세상살이에서 처음 그대로 영원히 변치 않는 게 없다. 그렇게 죽고 못 사는 사랑도 세월 앞에 속절없이 변한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하며 애절하게 눈물 흘리는 연인의 마음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지만 원래 삶이 그러하거늘 무얼 그리 마음에 담을 게 있을까. 심지어 사람의 몸을 구성하는 세포도 태어나고 늙고 죽는다. 1년 정도 지나면 우리 몸의 세포는 모두 새 세포로 교체된다. 그렇다면 과연 지금의 내 몸이 1년 전의 내 몸이라 말할 수 있을까? 변하지 않은 것은 없고 그렇기에 세상이 존재한다는 진공묘유의 철학이 가슴에 와닿는다.

 

단청을 입히지 않은 진묘원

뭐니 뭐니 해도 현불사의 가장 큰 특징은 본당에 단청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다. 나무로 지은 건물은 비바람과 병충해로 인해 쉽게 손상된다.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 건축물의 나무 위에 여러 가지 색으로 각종 문양을 그려 넣는 작업을 단청이라 한다. 단청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는데, 큰 사찰이나 궁궐에서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단청을 입히는 것이 전통이다. 그러나 현불사의 본당에는 단청을 입히지 않고, 나무 위에 옻칠하여 원목 그대로의 모습을 내보이고 있다. 그래서인지 본당의 안과 밖이 화려하지 않고 무척이나 수수하고 나뭇결의 자연미가 돋보인다.

 

현불사에는 큰 자랑거리가 있다. 본당 안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하얀색 옥, 즉 백옥으로 만든 비로나자불을 모셨다. 비로자나불은 역사적 존재로서의 부처가 아닌, 진리 그 자체인 불법(佛法)을 형성화했고, 우주와 만물을 지배하는 진리이자 법칙을 의미한다. 옥으로 만든 거대한 몸짓의 부처의 평온한 미소를 중생을 맞이하고 있다. 순수의 상징인 하얀 백옥의 부처 앞에서 서니 속세에 지친 내 영혼이 순백으로 정화되는 느낌이다. 현불사에서만 알현할 수 있는 백옥의 비로자나불에게 최대한 공경을 담은 절을 올렸다. 이만하면 불자의 자태가 보이지 않을까 하는 어쭙잖은 착각에 빠져본다.

 

 

백옥 비로자나불

 

현불사의 진묘원에 비로자나불을 모심으로써 진공묘유의 철학과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세계관을 완성하였다. 실제로 존재하는 존재로서의 부처가 아니라 우주와 세상을 만들고 존재하게 하는 세상의 근본 이치, 즉 불법(佛法)을 모신 것이다. 세상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성질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한 셈이다. 현불사의 세계관은 다른 유명 대찰의 그것을 계승하면서도 현불사만의 개방적 철학을 강조한 것이다. 

 
 

취정선원(翠庭禪苑)

취정선원

앞마당 오른쪽에는 주지 스님이 기거하시면서 수도에 증진하시는 요사채 취정선원(翠庭禪苑)’이 있다. 푸른색을 뜻하는 비취 정원으로 스님들이 선을 공부하는 도량이다. 이 건물을 지을 때 크게 시주한 신도의 뜻을 기리기 위해 그의 아호인 취정(翠庭)’을 따서 붙인 이름이다. 규모가 그리 크진 않지만 깊은 침묵 속에 잠긴 취정선원에는 부처님의 지혜를 배우려는 스님의 비장한 각오가 엿보인다. 취정선원에는 몇 개의 공부방과 신도들이 공양할 수 있는 식당이 있다.

 

어제는 밤이 늦어 인사를 올리지 못한 주지 스님을 뵈었다. 맑은 눈동자와 인자한 얼굴의 주지 스님이 정말 반갑게 우리를 맞이해 주셨다. 주지 스님과 지인 교수님의 20년이 넘는 오랜 인연이 주는 살가움이라 생각하니 나는 다 된 밥에 숟다가락 하나 얻는 혜택을 누리는 셈이다. 지인 교수님이 쌓은 공덕이 내게 큰 혜택으로 돌아오니 감사함을 따름이다. 천 리 길도 마다 아니 하고 버선발로 달려가 참 스승을 뵈어야 함이 배우는 자의 도리라 생각하면 스님과의 만남은 그래서 더욱 뜻이 깊다.

 

스님과 차를 앞에 두고 나눈 담소는 새로운 진리의 세계로 나를 이끈다. 평소 딱딱하고 어려운 한자 표기에 감히 공부할 엄두가 나지 않는 불교 경전을 쉽게 풀어 설명해 주신다. 생활 속에서 부처의 말씀을 실천하라는 스님의 말씀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공양하고 공경하고 예배하고 찬탄하라는 스님의 말씀은 일상생활의 신조로 남아야 할 금과옥조이다.

 

부처님의 말씀은 원래 인도의 고전 언어인 산스크리트어(संस्कृता, [saṃskṛtā])어로 기록되었다. 이것을 중국의 한자어로 번역할 것을 다시 한글로 풀어 쓰다 보니 읽고 이해하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웬만한 사람은 불교 경전을 감히 읽을 엄두조차 못 낼 정도로 어렵고 딱딱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스님의 말씀은 불교에 문외한인 내 귀에도 쏙쏙 들려오는 걸 보니 불력이 보통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스님의 말씀으로 영혼을 배부르게 하였더니 육체의 허기를 달래야 할 차례다. 스님께서 손수 요사채 안의 식당으로 우리를 이끄시며 부담 갖지 말고 편안하게 공양할 것을 주문하신다. 요사채 내부를 환히 꿰뚫고 있는 지인 교수님은 냉장고 안에 있는 각종 산채 나물을 꺼내어 부지런히 아침을 준비하였다. 일체 향이나 양념을 사용하지 않고 산채 본연의 향과 맛을 살린 갖은 나물로 밥을 비볐다. 왕금산에서 나고 햇빛과 달빛을 먹으면서 부처님 말씀 안에서 자란 산나물의 맛을 무엇과 비교할 것인가. 행복한 산사의 아침은 어느 재벌의 산해진미가 부럽지 않은 넘치는 호사이자 소박하면서도 화려한 먹방 여행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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