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월 7일(목)
8시 30분에 잠에서 깨어 산 중턱의 포매지로 향했다. 산골의 아침 바람은 매섭기가 살이 잘 선 칼날과 같다. 금방이라도 벨 것 같은 한기가 온몸을 파고든다. 도시에선 옷만 두껍게 입으면 웬만한 한기는 막을 수 있지만, 산골의 바람은 옷을 몇 겁을 입고 두꺼운 외투로 꽁꽁 싸도 막기 힘들다. 사방이 산이라 9시가 가까운데도 아직 해가 보이지 않아 차가운 공기가 매섭기가 보통 아니다. 저수지로 오르는 길에 10센티 너머 쌓인 눈이 발에 밟힌다. 발을 뗄 때마다 뽀득하는 소리가 정겨운 겨울 아침이다.
저수지 둑에서 스님을 만났다. 글을 잘 읽었노라고 말씀하신다. 약간의 교정을 가했고, ‘색즉시공’ 부분은 더 이야기하자는 말씀을 덧붙인다. 우주의 광대한 지식을 담은 글이라 기대된다는 과찬의 말씀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사실이 아닌 줄은 알지만, 기분이 좋은 건 분명하다. 스님께서 산으로 오르자고 권유하신다. 산길 중턱에서 너무 많이 쌓인 눈을 만났다. 운동화를 신고 왔기에 더 오르는 건 무리라 여기서 돌아가기로 한다. 등산화를 챙겨오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더 가고 싶지만 갈 수 없어 돌리는 발길이 아쉬운 건 가지 못한 길을 그리워하는 마음이다.
돌아서 내려오는 길에 이정표를 살폈다. 상월천, 하월천, 견불리라는 지명이 나온다. 원래 월천(月川)을 ‘달내’라는 우리 말로 불렀다. 그렇다면 상월천은 윗달내, 하월천은 아랫달내라고 불렸을 것이다. ‘월천’이라는 한자보다 ‘달내’라는 우리 말이 훨씬 입에 감긴다. 이리 좋은 이름을 두고 왜 굳이 한자 표기를 했을까? 아쉽다. 하긴 그렇게 사라지고 잊힌 우리의 옛글과 풍경이 어디 한두 개일까? 오래 간직해서 손때 묻어 윤이 나는 가구가 세월의 자치와 흔적으로 품격을 높인다. 그런 옛말과 글이 그립다. 산천은 변함없이 그대로 있는데, 사람은 그들이 남긴 자치와 함께 사라졌다.
포매지가 꽁꽁 얼었다. 저수지 위에서 발을 구른다. 얼음이 워낙 두꺼워 아무 느낌도 없다고 한다. 한겨울의 찬 호수 위로 바람이 휑하니 분다. 겨울 풍경의 백미는 뭐니 뭐니 해도 꽁꽁 언 호수 위를 걷는 것이다. 호수 위로 시린 겨울 하늘이 비친다. 겨울 호수에 빛은 하늘색이 너무 파래서 멋진 장면을 연출한다. 얼음 아래 시린 호수에도 생명을 꿈틀댄다. 솜씨 좋은 태공이면 얼음 뚫어 햇빛에 은빛 비늘 펄럭이는 고기 몇 마리를 건져 올릴 것이다.
저수지에서 내려오는 길에 해가 떠올랐다. 햇살이 차지 않고 제법 포근해서 살갑다. 호수를 오를 때 언 땅이 어느새 녹아 질척인다. 두꺼운 얼음 표면에 물기가 맺히는 걸 보니 햇살이 비치면 이네 눈이 녹을 것 같다. 그러나 산골 날씨야 대중이 없어 햇빛이 사라지면 추위는 여전할 것이다. 이곳은 사방이 산으로 싸여있어 쉬 햇살이 들지 않는다.
저수지에 내려와 함께 ‘취중선원’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 나물 반찬으로 한가득 그릇을 채운다. 워낙 산나물 반찬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성찬이다. 산해진미가 대수일까, 산중에서 이 정도 진미면 그만이다. 모든 반찬에 입에 당기고 김치맛도 일품이다. 무릇 음식 솜씨를 가늠하기에는 김치 맛을 따를 게 없다. 그런 점에서 보면 보살님의 음식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한마디로 명품 손맛이라 평하지 않을 수 없다. 입맛이 절로 나고 밥맛이 당기는 건 전적으로 보살님의 음식 솜씨 덕분이다.
아침밥을 든든히 먹고 현불사 아래 있는 동네로 마실 나갔다. 어느 곳이든 다 지천으로 눈이 깔렸다. 드문드문 장작더미가 눈으로 들어온다. 바싹 마른 걸 보니 쌓아둔 지 몇 년은 되었을 법하다. 이런저런 말을 나누다 다들 오늘 돌아갈 계획이라 한다. 가려면 한시라도 일찍 출발하는 것이 어떠냐고 말했다. 한두 시간 더 머문다고 산사 체험의 의미가 사는 게 아닐 바에는 일찍 출발하는 것이 좋다. 그래서 다들 서둘러 짐을 챙겨 떠날 준비를 한다. 4명이 함께 내려왔는데 이제 3명이 떠나면 나는 혼자가 된다.
그들은 떠나기 전에 스님께 인사한다. 스님께서 나도 가는 줄 알고 원고를 건네신다. 나는 며칠 더 묶을 거라는 이야기에 안도하신다. 하실 말씀이 꽤 있으신가 보다. 나도 반가운 소식이다. 다들 떠나고 오후 1시부터 원격강의를 했다. 틈틈이 원자 이야기를 담은 책을 읽었다. 오후 내 그렇게 보냈다. 너무 조용하고 시간이 정지된 것 같다. 책이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 건 전적으로 조용한 산사의 분위기 덕분이다.
저녁을 먹고 한 시간 정도 <원자, 인간을 완성하다>는 책을 읽고 마무리했다. 주요 원자가 인간의 몸을 어떻게 구성하고 체내에서 어떤 생물학적 작용을 하는지를 자세히 설명한다. 내게 굳이 필요 없는 내용이 많아 건너뛰고 중요한 부분만 읽었다. 어차피 세세한 원자의 생물학적 혹은 자연과학적 의미는 재미도 없거니와 굳이 알 필요가 있을까. 그걸 알려고 하는 노력보다 내가 보고 싶은 내용에 집중하는 것이 더 좋다. 독서의 요령일 것이다. 본질이 아닌 걸 읽느라 시간을 보내는 건 어리석은 행동이다. 많은 시간을 들여도 쉽게 이해되지 않은 부분도 많다. 이것저것 다 아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필요한 내용을 정확하게, 알고 싶은 것을 제대로 읽어야 독서의 즐거움이 배가된다.
오후에 ‘취정선원’에 있는 대원이라 이름 붙은 독방으로 옮겼다. 책상도 있고 방 규모가 자고 아늑해서 좋다. 집중해서 글을 읽기에는 아래쪽 방보다 좋다. 다만 샤워 시설과 화장실이 밖에 있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다. 그래도 이만하면 더할 나위 없는 산속 체험이다. 산골의 오후는 무척 재바르다. 해가 아직 중천에 있나 했더니 벌써 서쪽 하늘을 향해 잰걸음이다. 금방 해는 산 너머 넘어 집으로 간다. 그러면 잽싸게 어둠이 휘장을 드리우면 사방은 깜깜해진다. 산골의 밤은 그렇게 쉬 찾아와 한낮과는 달리 느린 걸음으로 머뭇거린다 그런 밤이라도 홀로 있어 외롭지 않은 것이 산사의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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