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를 위한 아름다운 동화
너무나 유명한 세계적인 여배우와 별 볼 일 없는 작은 책방 주인 남자. 두 사람이 어울릴 만한 구석이라곤 눈 씻고 찾아도 볼 수 없다. 평소 두 사람이 만날 확률은 전무하다. 할리우드 최고의 여배우가 런던 ‘노팅 힐’ 거리의 작은 책방 주인을 만날 일이 뭐 있을까? 그런데 두 사람이 만나 우여곡절을 겪지만 사랑에 빠진다. 헤어질 위기를 넘기고 결혼에 골인해 행복하게 산다. 남자를 위한 아름다운 동화, 영화 '노팅 힐' 이야기다.
윌리엄 대커(휴 그랜트)는 '노팅 힐' 거리에서 작은 여행 전문 서점 ‘트래블러 북 숍’을 운영한다. 그는 크게 다를 것 없는 그저 그런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날도 무료한 시간을 보낸다. 그때 누군가 서점 문을 열고 들어선다. 선글라스 쓴 아름다운 여인이다. 윌리엄은 그녀가 세계 최고의 여배우 안나 스콧(줄리아 로버츠)임을 한눈에 알아본다.
‘이럴 수가?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할리우드의 아름다운 여배우가 우리 가게에 오다니 믿을 수 없다.’ 안나를 본 윌리엄은 정신 줄을 놓치고 어쩔 줄 모른다. 어떻게든 말을 붙여 볼 요량으로 이것저것 여행 책을 권한다. 사실 그녀는 영화 시사회 때문에 런던에 왔다. 잠시 시간을 낸 그녀는 '노팅 힐' 거리를 산책했다. 그러다가 여행 책 전문 서점을 발견하고 들렀던 것이다. 그녀는 필요한 책을 사고는 서점을 나갔다.
윌리엄은 흥분한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오렌지 주스를 샀다. 손에 오렌지 주스를 들고 골목을 도는 순간, 그만 누군가와 부딪친다. 들고 있던 주스가 왈칵 쏟아졌다. 아뿔싸! 대형사고가 터졌다. 그것도 하필 안나의 옷에 노란색 오렌지 주스를 쏟은 것이다. 그녀의 검은 가죽 재킷 안의 하얀 셔츠가 온통 노란 오렌지 주스로 범벅이 됐다.
“미안해요. 길 건너 우리 집에 가서 물로 좀 씻어요. 5분이면 됩니다. 이상하게 오해하진 마세요. 저 파란 문이에요.”하고 윌리엄이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말한다.
도저히 그 상태로는 호텔로 돌아갈 수 없는 안나도 하는 수 윌리엄의 집으로 간다. 몸을 씻고 옷을 갈아 입은 안나는 윌리엄과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떠났던 안나가 가방을 찾으러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는 갑자기 안나는 윌리엄에게 짧은 입맞춤을 해준다. 이렇게 두 사람의 사랑이 시작된다.
결코 평범하지 않는, 그것도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의 사랑이 그리 쉽게 이루어질 리 없다. 아슬아슬한 위기를 넘긴 두 사람은 우여곡절 끝에 결혼에 골인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는 윌리엄과 임신한 안나가 '노팅 힐'의 공원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평범한 남자와 세계적 여자 배우와의 사랑 이야기다. 남성 신데렐라 영화인 셈이다.
영화 '노팅 힐'은 영화 비평가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고 흥행에도 크게 성공하였다. 당시까지 개봉한 영국 영화 가운데서 최고의 수익을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 아카데미상과 영국 코미디 상과 영화 음악으로 브리트 상을 포함한 다양한 분야에서 상을 받았다. 한 마디로 작품성과 흥행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았다.
파스텔 거리와 포트벨로 마켓
평범한 남자와의 사랑을 위해 할리우드 최고 여배우의 직위를 내려놓은 안나는 남자들의 로망이다. 그래서 그런지 영화를 무척 로맨틱하게 보았다. 그런 아름다운 기억이 남아서 일까? 런던으로 출장 간 차에 '노팅 힐'의 그곳을 찾았다. '노팅 힐' 거리에는 색색의 파스텔 집들이 줄지어 서 있어 볼만하다고 소문났다. 주말마다 열리는 포트벨로 로드 마켓은 런던의 명소다. 주말이면 영화 속의 서점과 파란 대문 집을 보러 온 사람과 관광객으로 시장은 넘쳐난다.
'노팅 힐'을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타고 '노팅 힐' 게이트(Notting Hill Gate)역에서 내린다. 도로 위로 올라오니 비가 내리고 있다. 가게에 들러 유니언 잭이 선명한 우산을 샀다. 가게 앞에 한 무리의 런던 젊은이들이 서 있다. 그들에게 '노팅 힐' 가는 길을 물었다. 길모퉁이를 돌아서 가다가 교차로에서 좌회전해서 한참을 가라고 한다. 그들이 알려준 데로 길을 걷다보니 교차로가 나오고 길을 건너 좌측으로 방향을 잡는다.
한참을 걷는데 '노팅 힐' 가는 길을 일러주던 젊은이들이 지나간다. 그들이 아는 체를 하면서 자신들을 따라오라고 한다. 자기들도 '노팅 힐'로 간다고 하는데 약간의 불량기가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들을 믿고 따라갔다. 어디서나 청춘은 방황하고 젊음은 갈 곳을 몰라 헤매는가 보다.
한적한 주택가의 이면도로를 한참이나 걸어갔다. 부유하고 유행을 선도하는 고급 지역으로 알려진 '노팅 힐'의 빅토리아 건축 양식이 매력적이다. '노팅 힐'의 집과 가게는 앙증맞은 파스텔 색칠을 했다.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마법의 거리처럼 예쁜 가게들이 줄지어 서 있다.
'노팅 힐'은 런던을 대표하는 쇼핑가로서 평소에는 한적하다가도 토요일이면 포트벨로 마켓(Portobello Market)이 열린다. 앤티크(antique) 제품을 파는 포트벨로 마켓에는 종일 많은 사람으로 붐빈다. 아쉽게도 우리가 간 날은 주말이 아니라 포트벨로 마켓을 구경할 수 없었다. 다음에는 주말에 이곳에 다시 오리라 속절없이 다짐한다.
파란 대문 집과 노을 속 풍경화
간간이 안개비 뿌리는 거리를 꿈꾸듯 걷다 보니 청년들이 저곳이 '노팅 힐'이라고 말한다. 영화의 배경이 된 '노팅 힐' 서점이 저 어디쯤 있다고 일러준다. 바쁜 걸음으로 그곳으로 갔다. 그러나 어디에도 영화 속의 서점을 찾을 수 없었다.
노천 카페에서 맥주를 마시는 사람에 물었다. 그가 길 건너 대각선의 건물을 지목한다. 가까이 가보니 영화 '노팅 힐'의 그 서점이다. 건물 외관은 그대로나 지금은 기념품 가게가 됐다. 영화 속 주인공처럼 그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가게가 크지 않고 소박하다. 윌리엄과 안나의 사랑이 싹튼 곳이라 생각하니 남다르게 보인다. 그 소박함이 오히려 낭만적인 맛을 느끼게 한다.
안개비는 아기자기한 '노팅 힐'의 거리를 더욱 이국적으로 만든다. 때마침 비가 그치고 서쪽 하늘에는 붉은 노을이 지고 있다. 노을은 파스텔 색 거리에도, 윌리엄의 파란 대문에도 내려 앉는다. 그림자가 길어지고 붉은 빛의 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나는 꿈을 꾸는 듯 아름다운 풍경 속 그림이 된다.
현대적이면서도 복고풍의 분위기가 공존하는 거리 풍경이 마음에 들었다. 육중한 고딕 양식의 대리석 건물만 보다가 색색으로 칠해진 알록달록한 거리를 걷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마음 맞는 사람과 함께하면 그 길이 아무리 멀어도 힘들지 않다. 걷는 걸음마다 즐거움과 재미가 넘쳐난다. '노팅 힐' 가는 길은 그렇다. 마음 맞는 이와 다시 걷고 싶다.
'노팅 힐'의 OST인 Elvis Costello의 She를 듣는다.
그녀는
내겐 잊을 수 없는 얼굴일지도 몰라.
기쁨의 흔적일지 후회의 흔적일까.
내게 보물일지 아니면 치러야 하는 고통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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