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력사의 보조로 팔려간 젤소미나
아주 오래된 영화가 기억난다. 영화 ‘길’은 1954년 흑백으로 제작된 옛날 영화다. 젤소니마는 연약한 체구에 큰 눈망울을 가진 아주 약간 모자라지만 맑은 영혼을 가진 숙녀다. 그녀의 고단하고 짧은 길 위의 삶을 통해 누구에게도 위안을 받을 수 없는 인간의 고독을 잘 표현했다. 그녀는 길 위를 떠도는 차력사 잠피노(안소니 퀸)의 조소가 되어 그로부터 진정한 사람을 받지 못하고 길 위에서 죽어간다.
베니스 영화제 실버라이온상, 뉴욕비평가협회와 아카데미최우수외국어 영화상, 최고 유럽 영화상 등을 수상한 명화다. 니노 로타(Nino Rota)의 애수에 찬 트펌펫 주제곡도 한층 더 사람의 마음을 흔든다. '길'의 주제곡은 지금도 많은 연주가들이 연주하는 명곡 중의 명곡이다. 이외에도 니노 로타는 알롱 드롱 주연의 '태양은 가득히' 그리고 올리비아 핫세의 '로미오와 줄리엣'도 작곡했다. 그는 영화 '대부1편'(1972)과 '대부2편(1974년)의 주제곡을 작곡한 뛰어난 작곡가다.
젤소미나는 홀어머니와 여러 여동생들과 가난하게 살고 있다. 그녀의 언니 로사가 잠피노의 차력사 노릇을 하다 죽었다. 잠피노는 죽은 로사 대신에 젤소미나를 1만 리라를 주고 데려온다. 잠피노는 이 동네 저 동네를 떠돌며 가슴으로 쇠사슬을 끊는 묘기를 보여주고 돈을 번다. 잠파노는 젤소미나에게 광대 분장을 하고 흥을 돋우는 북을 치게 한다. 지적으로 약간 모자란 젤소미나가 실수하면 그녀를 때리기도 했다.
젤소미나는 참다못해 잠피노에게서 도망쳐 서커스 공연자 마토를 만난다. 그는 지라타 서크스 공연단의 소속이 이었다. 혼자가 된 잠피노도 지라타 서커스 단원이 된다. 이렇게 해서 젤소미나와 잠피노는 다시 만난다. 마토는 잠피노가 차력쇼를 할 때마다 훼방을 놓거나 비웃었다. 둘 사이가 급속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
하루는 마토가 젤소미나에게 트름펫 부는 법을 알려주면서 자기 조수가 되어 달라고 한다. 이때 잠파노가 나타나 젤소미나를 막으려 하자 마토가 잠파노에게 물을 끼얹는다. 화가 난 잠파노가 칼을 빼들고 마토를 쫓다가 그만 경찰에 붙들려 잡혀가고 만다. 서커스단은 다시 공연을 떠나려 한다. 젤소미나는 자신을 잘 대해줬던 서커스를 따라가지 않고 다음날 유치장에서 나오는 잠파노와 함께 길을 떠난다.
잠피노는 차력 공연을 해서 돈이 모이면 술을 마신다. 그리고 술집에서 만난 여인과 훌쩍 떠난다. 그러다가 돈이 떨어지면 다시 돌아오길 반복한다. 이렇게 버려지고 학대받으면서도 잠피노가 돌아오면 젤소미나는 반가워하고 좋아한다. 마음은 천사같이 착하지만 심성이 여린 그녀는 스스로 험난한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그래서 늘 잠피노에게 짐이 될까 미안해하고, 버려질까 두려워한다. 그러면서 그로부터 어떤 위안을 받지도 못한다.
젤소미나의 슬픔
잠피노와 젤소미나가 낡아 빠져 너덜너덜해진 삼륜차를 타고 인적 없는 언덕길에서 마토를 우연히 만난다. 자동차 바퀴를 갈고 있던 마토가 잠피노를 보고 빈정댄다. 화가 난 잠피노가 마토에게 주먹을 날렸는데 넘어지면서 자동차 모서리에 부딪친다. 손목시계가 망가졌다고 투덜거리던 마토는 쓰러져 죽어버린다.
이 일로 젤소미나는 크게 충격을 받고 울부짖는다. 잠파노는 당황해 하다가 마토의 시체를 언덕 아래 시냇가 동굴에 집어 던진다. 그리고 그의 차를 언덕 아래로 굴려 폭파시킨다. 이 사건으로 젤소미나는 거의 반미치광이 상태가 된다. 북도 치지 않고 밥도 먹지 않는다.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 챈 잠피노가 그녀에게 집으로 돌아갈 것을 권유한다.
“엄마에게 돌아가. 엄마에게 데려다 줄게?”하고 잠피노가 젤소미나에게 말한다.
“그렇지만 내가 같이 있지 않으면 누가 당신 곁에 있겠어요?”하면서 그녀는 거절한다.
그러나 젤소미나는 끝끝내 그의 곁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 젤소미나의 상태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잠피노는 어느 폐허가 된 건물 곁에서 잠든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진다. 머리맡에는 약간의 돈을 남겨두고 잠든 그녀를 버려두고 혼자 길을 떠나 버린다.
세월이 흘러 몇 년이 지나 잠파노는 어느 대형 서커스 단원이 되어 공연한다. 마을길을 걷다 빨래를 널고 있는 여인이 젤소미나의 나팔 연주곡을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깜짝 놀라 누구에게 배웠느냐고 묻는다. 그녀는 오래 전 바닷가에서 혼자 있던 여자에게서 배웠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 여자는 병들어 죽었고 자기 아버지가 장례를 치렀다고 말한다. 그날 밤 잠파노는 술에 젤소미나가 죽어간 해변에서 통곡한다.
사는 건 길을 걷는 것이다.
사는 것은 길을 걷는 일인지 모르겠다. 산 사람은 너나 할 것 없이 길을 걷거나 그 위를 지난다. 그 길이 아스팔트나 시멘트로 포장한 매끈한 길일는지 먼지 펄펄 나는 흙길일지 알 수 없다. 도시에서는 흙먼지 이는 길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좁은 골목까지 포장을 했기 때문에 잡풀이 자라는 흙길을 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우리는 길을 따라 두 발을 힘차게 내딛고 걷기도 하지만 대개 차를 타고 쌩하니 달린다. 사람들은 점점 자동차의 편리함에 길들려져서 아주 가까운 거리에도 걷는 것을 귀찮게 여기고 차에 시동을 건다. 편리하고 빠른 만큼이나 길에 대한 사람들의 정겨움도 잃어버렸다. 갈수록 사람들은 걷기를 멀리하고 그저 자동차에 몸을 의지하여 쉽고 편리하게 길을 간다.
나는 걷기를 좋아한다. 제법 빠른 걸음으로 걷는다 해도 자동차로 이동하는 것에 훨씬 한가롭다. 지나치는 길목의 건물들을 살피기도 하고 골목길 집들을 이리저리 훑어본다. 차를 타고 지나칠 때는 보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볼 수 있다. 도시의 골목길은 생각보다 다양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철거하지 않고 내 버려진 집이 있는가 하면 깔끔하게 단장한 2층집도 보인다.
공단의 이면도로를 걸어가면 다양한 공장들이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을 본다. 지난 토요일 집에서 학교까지 걸었는데, 남동공단을 지나서 갔다. 휴일의 공간을 걷다보면 빈 공장의 한가한 얼굴을 본다. 직원들이 출근하지 않은 탓에 주차장은 차 한 대도 없고 건물 입구는 굳게 잠겨 있다. 휴일의 느긋함과 여유로움이 참 좋다. 이렇듯 걷다보면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도시의 내밀한 속살을 볼 수 있어 좋다.
그저 듣기만 해도
길이란 반드시 발로 걷는 물리적 공간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는 일에는 모두 고유한 길이 있다.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학문의 길이 있고 예술을 하는 사람에게는 예술의 길이 있다. 그리고 조리사의 길, 교사의 길. 엄마의 길이 있다. 사람이 어떤 위치에 있든 각자의 길이 있다. 그 길에는 그 나름의 나아가야 할 방향이 있다. 산다는 건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일이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차츰 친구들도 서로에 대한 이해나 관심이 줄어든다. 서로 생활하는 환경이 다르다 보면 상대의 처지를 전적으로 이해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더구나 사람이 처한 구체적인 환경을 경험하지 못하면 그들의 고통을 제대로 알기 힘들다. 그럴 때는 이해하려 하지 말고 그저 공감해 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냥 듣기만 하고 옳고 그름을 말하지 않으면 된다. 온 가슴으로 그의 아픔을 품어주면 된다.
살아가면서 들어주는 벗을 만나는 일은 축복이다. 일상에서 부딪치는 자잘한 아픔을 말벗하며 걷는다면 그 길이 신나고 즐거울 것이다. 무엇을 해결해 주지 않아도 그저 이야기를 나눈 것만으로도 응어리가 풀릴 수 있다. 어떤 사정이 있다 해도 온전히 그의 편이 응원해주는 사람이 있음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알 수 있다. 가끔은 감정이 복받쳐 슬퍼할 때는 일방적으로 그를 위안하고 그에게 상처를 준 이를 함께 미워해 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
시간이 지나면 마음은 누그러지기 마련이다. 마음 맞는 이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좋다. 혼자라면 자칫 흥분해서 엇나가기 쉬운 격정을 달래준다. 잠피노가 더 일찍 젤소미나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면 그녀는 그렇게 슬프지 않았다. 위안해 줄 아무것도 없는 세상에 고독하게 내버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세상이 엄혹해도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가 곁에 있다면 세상은 덜 외롭다. 아무리 험한 길이라도 멀리까지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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