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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의 미학

시골 간이역에서

by 전갈 2022. 5. 3.

2022년 5월 3일(화)

 

어제는 먼 남쪽 지방으로 출장을 갔다. 일을 마치고 시골 간이역으로 갔다. 그곳에서 대도시로 가는 기차를 타야 한다. 그리고 난 후 다시 서울 가는 기차를 타면 된다. 모처럼 간이역 여행이라 기분이 들뜬다.

 

조용한 시골 역사의 밤은 고즈넉하다. 역사 건너편에는 그리 높지 않은 아담한 아파트가 보인다. 야트막한 산이 제법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저녁노을도 서둘러 집으로 돌아간 자리에는 야금야금 어둠이 진격했다. 그러더니 금방 짙은 어둠이 온통 자리를 차지했다. 밤은 검은 휘장을 펄럭이며 마을과 역사를 뒤덮었다.

 

철길에 심어둔 라일락 향이 밤바람을 타고 사방으로 흩어진다. 간이역의 키 큰 가로등 불빛은 동그랗게 어둠을 밀어낸다. 까만 시간의 도화지에 빛의 동심원을 그렸다. 불빛 밖으로 어둠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웠다.

 

느릿한 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이의 뒷모습이 불빛 아래 어른거린다. 집집마다 긴 하루 보낸 이들을 맞느라 분주하다. 사람들은 창문마다 하나둘 등불을 밝힌다. 어느새 사람들도 새들도 바삐 집으로 돌아간다. 나는 오늘도 순례자가 되어 집으로 가는 먼길을 떠난다.

 

늦은 밤 홀로 간이역의 벤치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본다. 철길 따라 드문드문 놓인 벤치는 텅 비었다.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고 벌레 소리만 어둠과 티격태격한다. 대도시 역으로 가서 서울 가는 마지막 기차를 타려면 시간이 빠듯하다. 오늘따라 기차가 늦어진다는 안내 방송에 마음이 급해진다.

 

혹여 열차를 놓치면 어떡하나?”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조바심을 낸다. 한참을 기다리다 종내에는 어찌 되겠지 하고 마음은 끈을 놓는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 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불현듯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에서가 떠오른다. 5월이나 송이 눈이 쌓일 리 없고, 유리창마다 수수꽃 눈 시릴 일도 없다. 그렇지만 막차가 좀처럼 오지 않는다는 <사평역>의 기분만큼은 느낄 수 있다. 비록 이곳이 <사평역>이 아니면 어떤가?

 

한참이나 늦은 기차가 헐레벌떡 역사로 들어온다. 기차는 가까스로 시간에 맞춰 대도시의 역에 도착한다. 숨 쉴 틈 없이 역사로 미끄러지는 서울행 마지막 열차에 올랐다. 열차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깊은 어둠 속으로 냅다 달린다. 마음 졸인 탓일까? 자리에 앉으니 안도감이 든다. 고독마저 감미로운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