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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의 미학

“현재란 그런 거예요. 삶이 그러니까요.”(우디 앨런과 예쁜 도시 파리 이야기의 끝)

by 전갈 2022. 5. 9.

2022년 5월 9일(월)

미드나잇 인 파리 촬영 중의 우디 앨런(당시 76세)

 

“현재란 그런 거예요 늘 불만스럽죠. 삶이 그러니까요.”

우디 앨런 감독은 뉴욕을 사랑하는 전형적인 뉴욕커다. 그러면서도 그의 광적으로 유별난 파리(Paris) 사랑도 유명하다. 그런 그가 파리의 구석구석을 아름답게 묘사하고 가장 예술적으로 그린 영화가 ‘미드나잇 인 파리’(Midnight in Paris)다. 이 영화는 그가 아름다운 도시 파리에 바치는 헌사이자 100분 가까이 펼쳐지는 한 편의 풍경화다.

영화가 시작되고 200초 남짓한 시간 동안 아름다운 파리의 구석구석을 보여준다. 지베르니, 센강, 루브르 박물관, 베르사유 궁전, 로댕 박물관, 오랑주리 미술관, 셰익스피어&컴퍼니, 생투앙 벼룩시장, 방돔 광장, 생 에티엔 뒤 몽 성당, 퐁뇌프 다리, 노트르담 성당, 알렉상드르 3세 다리 등 손꼽아 셀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곳들이다. 비에 젖은 거리와 밤의 명소 등 어느 하나 감탄하지 않을 곳이 없다. 파리의 아름다움을 이 보다 더 꼼꼼히 보여주는 영화는 지금까지 없었다.

 

 

로댕 박물관

영화의 장면과 기가 막히게 어울리는 재즈풍의 음악은 또 어떤가? 시드니 베셋(Sidney Beche)의 우수에 젖은 트럼펫 연주가 한몫하는 'Si Tu Vois Ma Mere', 렘펠(Stephane Wrembel)의 집시 제즈풍의 경쾌하면서도 고독한 'Bistro Fada'.콜 포터의 이국적인 노랫말과 목소리의 'Let's Do It'도 어찌 빼놓을 수 있는가?

이 영화는 스토리, 영화 속 등장 인물, 파리의 풍경 그리고 음악까지 모두 아름답다. 영화를 보는 내내 우리 댈런이 얼마나 파리를 끔찍이 사랑하는지 느낄 수 있다. 사족이지만, 로맹미술관의 가이드(카를라 브루니)는 당시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의 부인이었다. 물론 그녀도 유명한 배우이기도 하지만, 로댕 미술관 가이드 역할로 너무 잘 어울린다.

영화는 사람들이 꿈꾸는 황금시대로의 여행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1920년대의 파리와 1800년대 말에서 1900년도 초반의 ‘아름다운 시대(belle epoque)'의 파리 두 곳으로 관객을 태운 시간 열차를 보낸다. 그러면서 주인공 길의 낮의 현실과 밤의 환상을 대비시키면서 이야기를 풀어간다.

주인공 길은 자신이 꿈꾸는 1920년대로 돌아간다. 그 곳에서 그는 피카소, 헤밍웨이, 앙리 마티스, 거트루드 스타인, 살바도르 달리, 모딜리아니, 장 콕토, 스콧 피츠제럴드, T.S엘리엇, 콜 포터 등 이름만으로도 세계 문학계와 화단 그리고 음악계를 풍비하던 천재들을 만난다. 거트루트 스티안의 살롱에서 벌어지는 피카소와 헤밍웨이의 열띤 토론, 살바도르 달리의 초현실주의적인 그림 이야기 등 당대 문학가와 예술가를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다. 우디 앨런 감독의 기발한 아이디어와 재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길은 1920년대의 파리에서 아름다운 아드리아나를 만난다. 그녀와 사랑에 빠진 그는 그녀를 따라 1800년대 말의 ‘아름다운 시대’로 간다. 두 번째 시간 여행의 열차를 탄 것이다. 물랑루즈외 맥심이 프랑스의 문화예술의 중심이던 그곳에서 길과 아드리아나는 로트랙, 폴 고갱, 에드가 드가를 만난다. 그들도 자신들이 꿈꾸는 황금시대가 있음을 알게 된다. 고갱은 르네상스 시대가 진정한 황금시대라 말하며 그곳으로 가고 싶다고 고백한다.

 

방둠 광장

 

역사상 파리가 가장 찬란한 문화와 예술을 꽃피우던 시절인 1920년대도, 세계 무역박람회가 열리고 에펠탑이 세워지던 물랑루즈의 ‘아름다운 시대’도 우리에게는 꿈에 그리는 황금시대다. 그러나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현실일 뿐이다. 그들에겐 지루하고 뭔가 알맹이가 빠진 현재에 불과하다. 자신의 시대를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의 속내가 다 그러할 것이다. 우리가 동경하고 아름답다고 감탄한 찬란한 세기도 당대의 사람에게는 단지 현재일 뿐이다. 그들도 돌아가고 싶은 과거의 이름다운 시절을 품고 살아간다.

우디 앨런은 돈을 적게 들여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잘 만든다. 그의 재기 넘치는 영화 가운데서 세계적으로 가장 히트한 영화가 바로 ‘미드나잇 인 파리’다. 700만 달러로 제작하여 약 1억 5100만 달러가 넘는 큰 수익을 거뒀다. 우리나라에서도 독립영화 수준의 작은 상영관에서 전국 36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으니 꽤나 성공을 거뒀다. 좋은 영화는 어디서나 관객이 알아보는 법이다.

이 영화는 상업적으로도 크게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2012년 각종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휩쓸었다. 우디 앨런은 작품성과 상업성의 두 마리 토끼를 잡는데 성공했다. 아름다운 파리를 위한 헌사답게 무척 우아하고 세련된 영화다. 영화에 등장하는 당대의 최고 예술가와 문학가 그리고 음악가를 보는 즐거움도 무척 쏠쏠하다.

영화 속 등장 인물들을 잘 모르거나 파리의 지명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리 큰 재미를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그저 화려한 말잔치와 파리의 예쁜 풍경만 보여주는 영화로 비칠 수 있다. 더구나 역동적인 액션을 좋아하는 관객은 지루해할런지도 모르겠다.

황금시대로 돌아가면 행복할까?

물랑루즈

“현재란 그런 거예요 늘 불만스럽죠. 삶이 그러니까요.”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시대를 꿈꾸게 될 거예요.”

우리는 모두 자신의 황금시대를 가슴에 품고 산다. 그때로 돌아가면 얼마나 낭만적이고 신날까? 늘 설레고 그립다. 그러나 실제 그 시절로 돌아가 살다보면 황금시대가 지루한 현실이 된다. 삶이 그러하고, 현실은 불만스럽다. 그곳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또 다른 황금시대를 꿈꿀 것이다.

어느 시대든 그때를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불만족스럽지만 한참 세월이 흐른 뒤 돌아보면 그때가 좋은 시절이었다. 주인공 길은 아드리아나를 벨레 에포크 시대로 보내고 약혼녀 이네즈와 파혼하고 불만스러운 현실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현재에서 황금시대를 찾기로 결심을 굳힌다. 어쩌면 가브리엘이 길이 바라는 황금시대일지도 모른다.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걸 갖고 어린 시절로 돌아가면 어떨까?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있으니 얼마나 신날까? 이미 알게 된 걸 갖고 그때로 돌아간다면, 첫사랑 그녀와 헤어지는 일도 없다. 그녀가 무엇을 원하고, 무엇 때문에 힘들었는지 알기에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미리 그녀의 마음에 드는 일을 골라서 할 것이다. 내가 고백하면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알기에 마음에 드는 말만 골라서 들려줄 것이다. 영화 속의 길이 아드리아나의 일기장을 보고 과거로 돌아가서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듯이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지금 아는 걸 갖고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할까? 숱한 세월이 지나 되돌아보는 그 시절이 내가 생각하는 그 시절과 똑같은 걸까? 분명히 다를 것이다. 그때로 돌아가고, 황금시대로 돌아간다고 하서 지금보다 나아지리라는 보장도 딱히 없다. 돌아갈 수 없는 시정을 아쉬워한들 무슨 소용이 있나. 그때 제대로 통찰하고 그때 만족했다면 지금 덜 후회할 것이다.

앞으로 10년이 지난 뒤에는 뭐라 말할까? 아마도 10년의 오늘을 아쉬워할 것이다. 그때 그랬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때 이렇게 했다면 말년에 행복할 것이다. 이런 말을 읊조리며 쓸쓸히 석양을 바라보지 않을까? 지난 알고 난 후 되돌아보는 건 참 쉽다. 영화 속의 길이 그랬듯이 한참 세월이 흐른 뒤 돌아보면 지금이 황금시대일 것이다.

시간의 붓은 햇빛과 달빛 물감을 듬뿍 묻혀 삶의 캔버스를 색칠한다. 기억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변하기에 10년 후에 기억하는 지금은 또 다른 모습이다. 변하지 않은 것은 오직 현재뿐이다. 결정해야 하고 만족하려면 지금 그래야 한다. 지금 그렇지 않으면 10년 뒤라고 달라질 게 하나 없다. 늘 부족함을 느낀다. 창의력은 부재하고 상상력은 가출했다. 지금이라도 가출한 그들을 불러들여 현재를 받아들이는 일이 더 급하다.

미국 작가인 킴버리 커버거(KImberly Kirberger)는 "지근 나는 걸 그때 알았더라면 내 가슴이 말하는 거에 더 자주 귀 기울였으리라"하고 말한다. 그녀는 "더 많이 놀고, 덜 초조해했으리라. 진정한 아름다움은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는 데 있음을 기억했을 것이다"고 한다.

그녀는 그때로 돌아가면 현실을 인정하고 자신의 마음을 잘 살피고 행복하리라 다짐한다. 말하자면 그녀는 그때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황금시대로 만들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지금도 그렇다. 황금시대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이다.

그렇지만 그리운 마음이야 어찌할까. 꼭 한 번만 돌아갈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