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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의 미학

머리에서 가슴까지 70년의 여행(김수환 추기경님의 말씀 중에서)

by 전갈 2022. 7. 9.

추기경님의 어렵고도 긴 70년의 여행
“머리와 입으로 하는 사랑에는 향기가 없기에,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도 긴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여행입니다.”하고 고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말씀하셨다. 추기경님께서는 “그 여행이 무려 70년이나 걸렸다.”고 하시며 참된 사랑의 의미를 전하셨다.

우리 두뇌의 앞부분인 전두엽에서 가슴까지 거리는 불과 20~25cm 남짓하다. 이 짧은 거리를 여행하는 데 무려 70년이나 걸리셨다는 말씀이다. 굳이 따져보자면 하루에 겨우 0.001cm씩 이동한다. 참으로 멀고 더딘 여행이다. 그것도 추기경님이시니 가능한 일이다.

얼마 전 작고한 이외수 작가가 『절대강자』에서 이렇게 말했다. 앎이 머리 머물러 있을 때는 지식이 되고, 가슴으로 자리를 옮겼을 때는 지성이 된다. 거기에 사랑이 더해져서 발효하면 지혜가 된다.

머릿속에 있는 수많은 단어나 지식의 파편들이 가득 쌓여 있다면 아는 게 많은 사람이다. 관념적인 지식을 완전히 이해하고 가슴에 품을 수 있는 사람은 지성인이다. 거기에다 사랑이라는 양념이 첨가되어 지성이 발효하면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

머리와 입으로 읊조리는 관념적 사랑이 실천적 사랑으로 발효할 때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사랑으로 가득한 추기경님께서 70년이나 걸리셨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일반인은 평생을 두고도 그곳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아는 것보다 행동하는 것이 좋고, 사랑 없는 행동보다 사랑 넘치는 행동이 좋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

아무리 먼 곳이라도 갈 수 있지만
한국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은 아르헨티나의 최남단에 있는 우수아이라(Ushuaia)는 도시다. 세상의 끝이라 불리는 작은 마을로 문명과 대자연이 살아 숨 쉬는 곳이다. 서울에서 출발해서 그곳까지의 거리는 약 17,766km라고 한다. 물론 약간의 오차는 있지만 대략 그 정도 거리라고 보면 된다. 하루 20~25km의 속도로 걷는다면 지구 반대편의 그곳까지 가는 데 약 2~3년이 걸린다.

오늘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 그곳을 향해 출발하면 걸어서 2~3년 후면 도착한다.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체력이 좋고 걸음이 빠른 사람은 그전에 도착할 수 있다. 누구나 끝까지 걷는다면 다소 시간의 차이는 있지만 3년 안쪽에 최종 목적지에 닿을 수 있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는 거리라 해다 해도 시간만이 주어지면 그곳에 갈 수 있다.

그렇지만 아는 건 많은데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 되는 데는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영영 그곳에 도달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아니 생전에 그곳에 도착하는 사람이 몇 안 된다. 그러니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우리에게 주문하신 사랑은 비단 남녀의 사랑만을 뜻하시는 건 아니다. 그보다 더 높은 차원의 사랑을 말씀하신 것이다.

사랑을 실천하라는 당부의 말씀
따지고 보면, 남녀 간의 사랑은 밀고 당기는 기쁨과 슬픔의 이중주다. 애(愛)의 날줄과 증(憎)의 씨줄을 촘촘히 엮어 사랑의 그림을 완성한다. 사랑은 영원히 두 사람과 함께할 것으로 생각한다.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누구나 그런 꿈을 꾼다. 영원할 줄 알았던 사랑의 색이 변한다. 행복은 잠시 머물렀다가 떠나고 애증의 잔해만 남는다. 남녀 간의 사랑은 그런 법이다. 완성된 사랑을 박제하지 않는 한, 그 사랑은 서서히 식어가고 떠난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죽음으로 사랑을 완성했다. 그들의 사랑은 박제되어 불멸의 신화로 남았다. 역설적이지만, 죽음만이 영원한 사랑을 이룬다. 사랑은 애증의 불꽃이자 열정의 완성이다. 그런 사랑도 잠시 머물렀다가 시든다. 그것은 남녀 간 사랑의 숙명이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랑이 있다.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은 단순히 남녀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더 큰 뜻의 사랑이다. 하느님에 대한, 부모님에 대한, 이웃에 대한, 심지어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사랑이다.

평생 사랑을 베푸시고 참사랑을 실천하신 추기경님께서 진정한 사랑을 깨치기까지 무려 70년이나 걸리셨다. 참으로 겸손하신 말씀이다. 그분의 일생이 사랑인데 어찌 그토록 긴 세월을 말씀하셨을까? 진실한 사랑을 실천하기 어려우니 그만큼 노력하라는 당부의 말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