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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의 치매

"후배야, 나 누군 줄 알겠니?"

by 전갈 2023. 6. 21.
사진 Pixabay

내가 알던 그는 어디로 갔나?

"지낼 만하니?"

"-------------"

"나 누군 줄 알겠니?"

"------------"

 

너무 말이 없어 묻는 내가 당황스럽고 난감하다. 이럴 수가 있나. 그토록 똑똑하고 착한 후배는 어디 갔단 말인가. 눈동자의 초점이 잡히지 않고 퀭한 사내가 내 앞에 있다. 고개를 숙인 채 얼굴을 제대로 들지 못한다.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건지 선뜻 대답을 못 한다. 인내하며 계속 말을 붙여 본다.  

 

"밥은 먹었니?"

"-------- 예!!"

 

한참 만에 겨우 입을 뗀다. 숨이 다 막힐 지경이다. 그래도 질문을 이어간다. 싫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지만, 오랜만에 만난 탓에 마음이 급하다. 후배는 거의 입을 열지 않고 그저 멍하니 서 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 한구석이 시퍼런 칼날에 베인 듯 아리다. 

 

다 큰 어른인데 어린아이처럼 행동한다. 말도 어눌하고 동작도 굼뜨다. 투정을 부리고 짜증도 낸다. 늘 배가 고프다고 칭얼대는 걸 보면 갓난아이와 너무 닮았다.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한다. 눈앞에 펼쳐진 이런 풍경을 도무지 믿을 수 없다. 저 멀리 우주로 탐사선을 쏘아 올리는 시대 아닌가. 그런데도 총명한 사람이 이토록 무기력해지는 걸 지켜봐야 한다니 너무 안타깝다.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옛날의 그가 아니다. 영민하던 눈빛은 사라지고, 부드러운 미소도 보이지 않는다. 생기 잃은 얼굴에 허리마저 꾸부정하다. 자칫하면 입으로 침이라도 흘릴 판이다. 한때 주위의 희망이던 그가 이렇게 변하다니, 도대체 누가 이렇게 만든 것인가.

 

혼자만의 세상에 사는 후배

치매 환자는 환상 속에 산다. 자기가 사는 곳이 천국인지 아니면 지옥인지 분간하지 못한다. 환자는 자기가 어떤 상황에 빠졌는지 알 수 없다. 아무것도 모르는 본인에게는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비극적이면서도 동시에 희극적인 이 잔인한 역설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몽환 속에 사는 치매 환자를 지켜보는 아픔은 오롯이 남은 가족 몫이다. 치매는 사랑한 사람을 전혀 낯선 사람으로 바꿔놓는다. 긴 간병은 사랑을 증오로 바꿀 정도로 잔인하다. 아직 치료법이 없다는 사실에 가슴만 친다. 끊임없이 했던 이야기를 하고 또 한다. 집을 두고도 밤이면 밤마다 집으로 간다고 보채니 가족은 환장할 노릇이다.  

 

제때 약을 먹고 관리를 잘하면 악화하는 속도를 늦춘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 관리가 얼마나 힘든 줄 경험해 본 사람은 안다. 뾰족한 해결책이 없어 가족들의 애를 까맣게 태운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환자를 돌보지만, 남은 사람은 마음에는 깊은 상처가 남는다.

 

가족 중에 누가 치매에 걸리면 누군가 한 사람이 전담해야 한다. 일상을 접어두고 환자 곁에 있어야 환자를 돌볼 수 있다. 돌보는 가족의 건강도 나빠진다. 심지어 가족까지 우울증에 빠질 수 있다. 오죽하면 치매 환자를 돌보는 가족을 '숨겨진 환자'라고 부를까. 그렇다고 나 몰라라 내팽개칠 수도 없는 것이 가족의 숙명이다.

 

후배는 점점 말 수를 잃었다. 어쩌면 말하는 방법조차 잊은 것 같다. 한때 조리 있게 말하고, 사람을 설득하는 능력이 출중한 그였다. 영어를 잘해 미국으로 연수까지 다녀왔다. 그런 그가 벙어리로 내 앞에 서 있다. 젊은 시절 사르트르를 이야기하고 '실존주의(實存主義)'를 논하던 그였다. 그가 왜 그리 '실존(實存)'에 그리도 깊이 빠졌는지 이제야 알 것 같기도 하다.

 

무슨 말을 해도 대답 없는 그를 보니 마음이 찢어진다. 그저 멍하니 벽만 보는 후배를 위해 내가 해 줄 수 없는 게 없다. 무얼 해야 그가 나아질까. 그 옛날의 그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 사람이 이렇게 무너질 수도 있구나. 그런 생각에 목이 메고, 와락 슬픔이 밀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