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월 15일(일)
월정사 8각9층탑의 아름다움에 감탄한 나는 적광전에 들러 부처님께 인사를 올렸다. 사찰의 가르침과 석탑의 미학을 즐기고 간다는 말씀도 남겼다. ‘집을 나설 때 부모님께 인사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부모님께 인사한다는 ’출필고 반필면(出必告 反必面)‘이란 옛말이 생각난다. 절에 들어서면 부처께 인사하고 떠날 때 부처께 인사한다는 것도 같은 의미일 것이다. 하긴 요즘은 부모님과 따로 사는 집이 많아 직접 얼굴 보고 인사할 일은 그리 흔치 않다. 다만 전화로나마 자주 안부를 구하는 것도 이 말을 실천하기에 좋다.
이제 머스탱은 약 9킬로미터 떨어진 오대산 중턱에 자리한 상원사로 간다. 월정사 옆으로 난 산길을 달리자 이내 비포장도로를 만난다. 처음으로 울퉁불퉁한 길을 만난 머스탱은 싫은 내색 없이 편안하게 산길을 오른다. 건조한 날에는 찻길에는 온통 먼지가 날리지만, 오늘(8월 13일 금)은 습도가 높아서 길에 먼지가 일지 않아 산길 풍경을 즐기기 좋다. 상원로 오르는 길 좌우로 우거진 나무들이 한여름의 더위를 식혀준다. 여름 한 철 깊은 산속 암자에서 보내노라면 시간이 절로 흐를 것이다.
이윽고 상원사 주차장에 도착했다. 경내는 주차 공간이 없어 절 아래 마련한 공간에 머스탱을 잠시 쉬게 하였다. 주차장이 그리 넓지 않은데도 생각보다 주차된 차가 별로 없다. 아마 대부분 사람은 월정사에 들렀다가 상원사로 오지 않고 길을 떠났나 보다. 다음에는 월정사에 주차하고 걸어서 상원사에 오르리라 다짐한다. 계곡의 물소리와 바람 소리와 벗하여 산길을 허위허위 오르면 극락정토 가는 길이 따로 없음을 느끼지 않을까?
계단을 따라 경내로 들어가니 번잡한 월정사와 달리 조용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해발 1,100미터의 높은 곳에 터를 잡은 상원사는 사람의 발길이 그리 많지 않아 조용함과 엄숙함을 간직하고 있다. 상원사는 강원도 평창군에 있는 조계종 소속으로 월정사의 말사로 월정사와 함께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세웠다. 그 후 성덕왕 4년(705년)에 중창하였으나, 1946년에 불타 1947년에 새로 지은 절이다. 상원사 역시 월정사와 더불어 약 1500년의 세월 동안 부처의 말씀과 진리를 설파해온 불심 깊은 절이다.
상원사에 관한 첫 이야기는 신라 신문왕의 아들인 효명 왕자가 오대산에 들어와 차를 달여 문수보살에게 공양을 올린 것에서 시작된다. 문수보살을 열심히 공양한 그가 서라벌로 돌아와 왕위에 오르니 효소왕이었다. 그는 문수보살의 은덕에 보답하기 위해 재위 4년 때인 696년에 지금의 상원사 터에 ‘진여원(眞如阮)’을 창건하였다. 그 후 그는 문수보살상(문수동자좌상)을 봉안했고 20년 후에는 동종(국보 제36호)을 조성했다. 한강의 발원지인 ‘우통수’가 바로 옆에 있어. 오대산 일대는 우리의 정신과 문명의 중심지라 해도 손색이 없다. 특히 상원사는 문수보살이 백성들에게 자비를 베푼 가피(加被) 영험이 전하는 기도 도량으로 이름이 높다. 특히 세조는 문수보살을 친견하여 가피를 받은 은덕으로 진여원을 중창하였다.
왜 우리나라 사찰에는 서로 다른 이름의 전각이 많을까? 대웅전이 있는가 하면, 문수전이 있고, 또 어떤 절은 적광전을 중심에 둔다. 그 까닭은 어떤 분을 모셨는지에 따라 중심전각의 이름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비로자나불, 약사여래, 미륵불 가운데 어느 부처님을 모시느냐에 따라 중심 전각의 이름이 달라진다.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모시는 절은 ‘대적광전’(大寂光殿), 아미타불을 모시는 부석사 같은 절에는 ‘무량수전’(無量壽殿)이 있다. 월정사는 석가모니와 비로자나불을 동시에 모시고 있어 상징적으로 ‘적광전’이라는 이름을 현판에 새겼다.
이제 상원사의 중심 전각이 ‘대웅전’이 아니라 ‘문수전’이 된 까닭을 알 수 있다. 신라 효소왕이 문수보살의 은덕을 기리기 위해 상원사를 창건하면서 문수보살을 중심 전각에 모셨기 때문이다. 석가모니를 모신 절은 대웅전이라고 하고, 문수보살을 모신 절은 문수전(文殊殿)이라고 하는 것에 유래한 이름 짓기다. 보살에는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지장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이 계시는데, 이분들이 맡은 영역과 역할에 따라 각기 다른 이름을 붙이는 것도 특징이다.
이처럼 불교에서는 여러 부처님과 보살님이 여러분 계시고, 이분들이 힘을 합쳐 중생을 계도하고 지혜를 준다. 어느 한 분이 절대적 권능을 갖고 사람의 길흉화복을 점지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힘을 합쳐 중생의 앞길을 밝힌다는 점에서 다른 종교에 비해 더 민주적이라 할 수 있다. 같은 신을 믿으면서 종파의 차이 때문에 끝임없이 전쟁을 일으켜 죄 없는 사람이 죽어가는 종교를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종교는 사람에게 마음의 평화를 주고, 그들의 일상생활에 위안을 주는 것이 목적이다. 모든 신은 사람들에게 깊은 애정과 사랑을 베풀지만, 신의 말씀을 해석하는 사람들은 서로 질시하고 반복한다. 정작 따라야 할 말씀을 따르지 않고 그들의 주장만 내세운다니 이 얼마나 비극적인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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