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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의 미학

야생마와 사찰 여행

by 전갈 2022. 3. 28.

2012년 8월 14일(토)

 

20218월, 12일 강원도 현불사, 휴휴암, 오대산 월정사, 상원사를 다녀왔다. 목요일 오후 4시 근사한 자동차가 한 대가 미끄러지듯 내 앞에 선다. 자동차 모델의 신기원을 이룬 매혹적인 자동차로 한때 전 세계 자동차 애호가들의 피를 들끓게 만든 차다. 일행이 몰고 온 박력 넘치는 이름의 야생마머스탱(Mustang)이다.

 

1964417일 선보인 미국 포드 사의 머스탱은 당시 허리우드 최고의 인기 배우 스티브 매퀸(Steve McQueen)의 영화 불릿(Bullitt)에서 10여 분간 차량 추격전에도 등장했다. 이 영화를 본 세계 각국의 젊은이들은 머스탱의 매력에 열광적으로 푹 빠졌다. 지금은 포르쉐나 페라리가 젊은이들의 사이에 큰 인기지만, 이들이 닮고자 열망했던 차가 바로 머스탱이다. 말하자면 머스탱은 경주용 자동차 세계에서는 불후의 명차라 할 수 있다. 그런 전설의 스포츠카를 타고 우리 국토의 마지막 남은 야생, 강원도 산길을 질주한다 생각하니 아드레날린이 폭발했다. 날렵하면서도 힘이 넘치는 머스탱의 모습에 어찌 매료되지 않을 수 있을까?

 

머스탱

 

머스탱은 어느새 판교를 지나 영동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머스탱은 높은 산봉우리들이 파도치는 강원도의 산길을 거침없이 내달린다. 거친 숨소리 하나 내지 않는, 중후하면서도 날렵한 머스탱은 쏜살같은 속도로 산과 강 그리고 마을을 연이어 지나쳤다 짙은 녹색과 연두색을 몇 겹으로 덧칠한 여름 산의 높은 봉우리를 야생마는 거침없이 달린다. 산악 도로를 사뿐하게 달리는 머스탱을 보노라면 야생마란 별명을 기가 막히게 잘 지었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출발한 지 4시간쯤 지나 하조대에 도착했다. 하조대 해변의 포장마차에서 간단한 저녁을 먹고 파도가 넘실거리는 밤바다를 보았다. 파도는 억겁의 세월 속에서 한순간도 쉬지 않고 해변을 할퀴며 하얀 모래를 백사장으로 실어 날랐다. 끝 간 곳 없는 밤바다를 보며 옛 추억을 떠올렸다. 이미 기억 마저 희미해진 남해 밤바다의 애틋한 순간이 이제는 아스라이 추억으로 남았다. 세월의 붓은 그때의 기억을 멋지게 채색하여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 주었다. 오랜만에 마주한 밤바다는 그렇게 뜻밖의 미소를 내게 선물했다.

 

늦은 밤바다를 하조대 해변에 남기고, 9시쯤 강원도 양양군 현남면 현불사에 도착했다. 짙은 어둠 속의 좁은 산길을 거리낌 없이 운전한다. 이 길을 얼마나 자주 오간 베테랑의 풍모가 보인다. 어찌 저리도 깊은 밤의 산길 운전이 부드러울까? 매일 오가는 길인 양 아무런 주저함 없이 머스탱과 함께 호흡하는 모습이 근사하다. 키 낮은 잡목과 풀이 우거진 길을 이리저리 헤치고선 드디어 현불암 앞마당에 도착했다. 차 문을 여는 순간 느껴지는 깊은 산골의 숲 향기 가득한 바람이 더없이 좋다. 귀뚜라미 소리와 벌레 소리가 밤의 교향곡처럼 멋진 하모니를 연주한다. 작은 개울에서 들려오는 물소리도 깊은 밤의 정취를 더욱 아름답게 수놓는다.

 

주지 스님께 인사드리기에는 밤이 늦었다. 결례를 무릅쓰고 먼저 숙소에 짐을 풀었다. 12일의 짧은 일정이라 짐이라고 해봐야 가방 하나에 불과하지만, 제법 여행의 구색을 갖추 짐을 꾸렸다. 붉은 향토로 벽을 칠한 숙소는 생각보다 깔끔하고 정갈하다. 아마 이곳을 관리하는 보살님의 손길이 예사롭지 않다는 뜻일 것이다. 원목의 결을 그대로 살린 침대와 깨끗이 세탁한 이부자리가 마음마저 정갈하게 해준다. 인도하는 동료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산골의 밤이 고즈넉이 깊었다.

 

여행을 떠날 때면 늘 설렘을 가방에 가득 챙긴다. 새로운 것을 기대하고 낯선 이와 눈에 익지 않는 거리 풍경에 매료되는 설렘 말이다. 이번 강원도 사찰 여행도 어김없이 그런 설렘으로 가득하다. 오는 길 내내 짙푸른 풍경이 주는 평온함과 하얀 파도가 밀려왔다 가는 바다 풍경도 잊을 수 없다. 차창을 내렸을 때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머스탱의 경쾌한 소리도 마음속을 뻥 뚫어 놓기에 부족함이 없다. 내일 돌아갈 때면 설렘을 비운 가방 가득 그리움을 채을 것이다. 여행은 그러하기에 언제, 어디로 든 늘 떠나고 싶은 마음이다.

 

사람을 사귀는 데는 함께 여행하는 일이 제격이라 말한다. 여정을 함께하는 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를 알아갈 수 있다는 뜻이다. 서로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공감하면서 우정을 쌓아가겠지. 예기치 못한 일이 생기면 합심해서 어려움을 풀어 가는 일은 여행이 주는 또 다른 묘미다. 바쁘고 소란스러운 도시에서는 애써 시간을 내지 않는다면 속 깊은 말을 나눌 기회가 없다. 그러나 함께 여행하는 시간은 오롯이 여행자들의 몫이라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그 시간을 즐길 수 있다. 그래서 이번 12일의 3사 순례가 멋진 여행이 될 거라 기대한다. 그 기대에 걸맞게 너무나 멋진 여행의 첫날 밤이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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